응달에 든 햇볕처럼 따뜻한 소설
응달에 든 햇볕처럼 따뜻한 소설
  • 북데일리
  • 승인 2007.02.2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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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벌써 한참 전이네요. 모 방송국에서 방영해 주었던 <슈퍼소년 앤드류>라는 외화를 기억하는 분들, 많이 계신가요? 많은 아이들이 그랬었겠지만, 앤드류는 그 시절, 저의 우상이었습니다. 뭐, 소싯적의 ‘우상’이라는 것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긴 하나, 아무튼 좋아하지 않았던 과학에까지 관심을 가져가며, 한때 볼에 홍조를 띠어가며 보았었습니다.

하도 오래 전이라, 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평범한 소년 앤드류는 옆집 과학자 아저씨의 실험 중 감마선에 노출되었나 어쨌나 해서 아무튼 슈퍼소년이 되었죠. 누구나 한 번쯤 나에게도 신이한 능력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마음을 기막히게 들추어내 달래주었던 외화로, 앤드류는 웬만한 자동차보다도 빨리 달리고, 스프레이 두 개를 손에 쥐고 거침없이 날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 오빠랑 둘이 모기약 들고 몰래 시도해 보다 어른들께 혼나기도 많이 혼났었지요.

여기, 앤드류보다 훨씬 전, 신이한 능력을 가진, 벽으로 드나들 수 있었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네, 제가 오늘 여러분 앞에 놓아드릴 책은 바로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Le passe-muraille)>(문학동네. 2002)로, 제가 여러분 곁에 있으면 제 열혈추천으로 인해 침 몇 방울 튕기는 무례를 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느 날, 전기가 나간 벽을 더듬다가 자신에게 벽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티 유욀, 그는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그 능력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괴롭히는 상사를 놀라게 하기 위해 사용했던 능력이 그 안의 은밀한 욕망을 일깨워버렸죠.

뒤티 유욀의 일탈은 오직 액셀러레이터만 있을 뿐,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그는 일탈의 가속도를 즐기기라도 하듯, 변화할 줄 몰랐던 고지식의 벽을 뚫었고, 자신이 가진 한계의 벽을 뚫었고, 고지식이라는 벽을 뚫었고, 마음의 벽을 뚫었습니다. 물론, 의사가 처방한 약에 의해, 사실은 자신의 ‘욕망의 벽’을 뚫지 못해 결국 벽에 갇히고 마는 꼴이 되었지만.

역자후기에 의하면, 그는 지금도 벽 속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파리 몽마르트 언덕 북서사면에 있는 노르뱅 거리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사거리 한 모퉁이에서 작은 광장 하나를 만날 수 있는데, 그 광장의 이름이 바로 ‘마르셀 에메’ 광장이라고 해요. 거기에는 한 남자가 건물 벽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쓰고 있는 동상이 있는데, 그가 바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뒤티 유욀’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이 중 바로 그 처음이 ‘마르셀 에메’랍니다. 장편읽기보다 단편읽기를 좋아하고, 장편쓰기보다 단편쓰기를 좋아하는 저는 에메의 빛나는 단편들의 영향을 대놓고 많이 받았습니다. 원래 소설집에는 포함되어 있었지만, 저작권 상의 문제로 제외되었다는 소설, ‘사빈느’는 제 멱살을 잡고 상상력의 극한까지 끌고 들어가, 상상력의 한 가운데 내동댕이쳤던 실로 놀라운 단편이었습니다. 욕망을 분신술로 간단히 화(化)한 작가의 역량에 마음이 콩닥거려 한참동안 아무 일도 못하며 무지하게 감탄만 했었습니다.

“현대 프랑스 단편소설에는 특유의 분위기와 암묵적인 규칙과 전형적인 문체가 있다. 그 모든 것에 대해 모파상보다는 마르셀 에메에게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1986년 3월 프랑스 문예지 ‘짧은 글’에 실린 말입니다. 마르셀 에메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일전에 소개했던 아돌프 비오이 까사레스나 보르헤스의 환상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도 살짝 듭니다. 하지만, 분명 달라요. 프랑스 문학이 가진 특유의 느낌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방금, 어둡고 공허한 느낌을 주는 난해하고 음울한 프랑스 문학만을 떠올리셨다면, 오산입니다. 에메의 소설은 빠르고 유쾌하게 읽히는데다가, 활기차고 따뜻한 느낌으로 인간을 보듬어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죠.

소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원래 열편이었으나, 문학동네에서 나온 것은 네 편은 정서상의 문제로 빠지게 되고, 저작권상의 문제로 인해 ‘사빈느’가 빠져 있습니다. 이것 빠지고, 저것 빠지고 뭐 볼 게 있겠느냐 하시겠지만, 소설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포함, 여섯 편의 짧은 단편이 부담 없이 엮여져 있습니다.

그 중 ‘생존시간카드’는 이 소설집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으로 정부의 식량 정책에 따라, 비생산적인 소비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법령이 발휘되어 생존시간카드 암거래가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이야기인데, 문장 하나하나가 재기가 넘치는데다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넘기는 속도와는 다르게 작은 머리통은 한없이 복잡해졌었답니다.

그 외, ‘속담’이나 ‘천국에 간 집달리’, ‘칠십 리 장화’ 등도 재치 있게 당시 현실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지만, 괴로운 일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나 응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따뜻한 온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으니 이 책은 꼭, 꼭, 꼭 맛보시라고 추천해 드립니다. 또한, 국내에 <착한 고양이 알퐁소>, <파리의 포도주> 등 마르셀 에메의 주옥같은 소설들이 여러 편 나와 있으니 이 역시 욕심 부려 접해보실 것을 권합니다. 이상!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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