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의학만화의 선구자 `블랙 잭`
일본 의학만화의 선구자 `블랙 잭`
  • 북데일리
  • 승인 2007.02.26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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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블랙 잭이라는 의사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화타와도 견줄만한 수술 실력을 지녔으나, 그는 소속된 병원도 없고 심지어는 의사 면허도 없습니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불가능하다는 수술을 성공으로 이끌고 거액의 수술비를 받습니다. 한 마디로 어둠의 세계에 존재하는 의사입니다.

테츠카 오사무는 일본 만화의 너무나 많은 것을 결정지어버린 거목입니다. 그가 있어서 일본 만화가 지금과 같은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작품들이 너무나 훌륭한 탓에 후학들이 감히 그의 작품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블랙 잭>(학산문화사. 2001)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의학만화의 선구자격인 저 작품이 너무나 위대한 탓에 의학만화 속에서 아직도 작가들은 블랙 잭의 그림자를 떨어뜨리지 못합니다.

사토 슈호는 젊은 인턴의의 시각에서 병원의 문제점을 바라보는 의학만화의 제목을 아예 <헬로우 블랙잭>(블랙잭에게 안부를)이라고 지어버렸고, 인간복제라는 SF적인 소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요시토미 아키히토의 <레이>에는 신비의 의사로 BJ 라는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얼굴에 블랙잭과 동일한 상처까지 있는 BJ라는 의사는 누가 보아도 명백한 <블랙 잭>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마후네 카즈오의 <닥터 K>에서는 블랙 잭처럼 떠돌면서 의료활동을 펴는 의사가 나오고, 야마다 타키토시의 <닥터 코토의 진료소>에서도 대학병원을 떠나 낙도에서 의료활동을 펴는 의사가 주인공입니다. 심지어 이들 작품의 에피소드에는 <블랙 잭>의 에피소드를 그대로 따라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닥터 K>에서 붕괴된 건물 안에 갇힌 채로 응급 수술을 하는 에피소드나, <닥터 코토의 진료소>에서 코토가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수술하는 에피소드는 이미 <블랙 잭>에 수록된 에피소드를 따라간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블랙 잭이라는 캐릭터가 이처럼 오랫동안 일본의 의학만화에 남아있는 것일까요? 이는 지난주에도 다룬 바 있던 일본 병원 내부의 파벌구도와 연관이 있습니다. 진정한 의사가 오래 남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빨리 붙는 의사가 오래 남는 현실이 만화를 통해서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의료활동을 펴려는 의사들은 병원 내부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노기자카 타로의 <의룡>에 등장하는 아사다 역시 마찬가지의 인물입니다. 대학병원에서 선배의 의료미스를 대신 뒤집어쓰고 좌천당한 아사다 류타로는 NGO 활동을 통해서 새로운 의학에 눈을 뜹니다. 그를 메이신 대학 병원으로 데리고 온 흉부심장외과의 조교수 카토는 천재적인 수술 실력을 지닌 아사다를 통해 바치스타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고나서 자신은 교수에 오른다 라는 정략적인 계산을 하지만, 아사다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수술을 통해 생명을 구해내는 것뿐입니다.

일본의 관료사회를 풍자하며 큰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에서 젊은 형사 아오시마(오다 유지)는 정년퇴직을 앞둔 노형사 와쿠가 과거에 했던 말을 우연히 알게 됩니다. `옳은 일을 하려거든 성공해서 높은 자리에 가라` 라는 말입니다. 일본의 의학만화에 묘사되는 병원들은 <춤추는 대수사선>에 나오는 경찰들처럼 경직된 구조입니다. 아사다 류타로가 다른 의학만화의 의사들과 차별점을 두는 부분은 여기서 나옵니다. 그는 지위나 명예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지만, 카토를 교수로 만들어서 그녀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합니다.

아사다의 모습은 바로 병원으로 간 블랙 잭을 연상케 합니다. 귀찮은 일을 싫어하고 평소에는 한없이 느슨해 보이지만,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그 순간만큼은 초인적인 집중력을 보여줍니다. 블랙 잭이 아마도 병원 의국에 소속되었다면 아사다와 같은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환자를 인간으로 대할 줄 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후네 카즈오의 <닥터 K>에서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 인간적인 매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헬로우 블랙잭>이나 <닥터 코토의 진료소>와 같은 작품은 지나치게 인간적이어서 의학만화의 참된 매력마저 놓친다는 느낌을 주는 데, <의룡>은 <블랙 잭>처럼 그 중간에 서서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습니다.

마지막으로 블랙 잭의 그림자에 대해 다시 언급하자면, 블랙 잭의 그림자는 단지 의학만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의 실력을 갖춘 아웃사이더 블랙 잭의 캐릭터는 그만큼 강렬하기에 굳이 의학만화가 아니더라도 전문적인 프로페셔널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도 상당히 많이 차용되었습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파인애플 아미>에 나오는 용병 제드 고시나 호소노 후지히코의 <갤러리 페이크>에 나오는 후지타 레이지와 같은 캐릭터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스페셜리스트이지만, 블랙 잭처럼 주류를 떠나 아웃사이더로 활동하는 스페셜리스트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 찾아보면 이처럼 블랙 잭과 같은 `독고다이` 인생을 즐기는 캐릭터는 만화 속에서 의외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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