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기행]<4>환향녀, 조선의 성리학을 비웃다
[열녀기행]<4>환향녀, 조선의 성리학을 비웃다
  • 김지연 시민기자
  • 승인 2013.04.0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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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돌아와 수모...누구 위한 절개인가

[북데일리] 강화 충렬사는 선원(仙源) 김상용을 비롯한 병자호란•신미양요 당시 충신 28명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며,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자결한 이상길의 위패도 이곳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김상용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세자비와 왕자들을 모시고 강화로 피신하였다가 청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손자와 함께 강화산성 남문루에 올라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충렬사 내부로 들어가려 하였지만 대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웠다. 정문은 세 개의 문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각각의 문 중앙에 태극 무늬가 크게 그려져 있어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충렬사와 같이 전쟁 중 자신의 목숨을 바친 남성들은 순절비 혹은 사당에 위패를 모셔 그 뜻을 후대에 남기고 있지만, 갑곶돈대에서 몸을 던진 수많은 조선의 여성을 위로하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에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강화도 충렬사

이와 같이 장조이를 비롯한 여인들의 무고한 목숨은 목숨대로 희생을 당하며 청에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한 채 조선은 결국 항복하게 된다. 그 결과 인조는 삼배구 고두례(三拜九敲頭禮), 일명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며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전쟁은 종결된다. 이 때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 태종의 요구로 세운 비석으로, 청이 인조가 항복의 예를 행한 삼전도에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비의 건립을 조선에 강요해 어쩔 수 없이 임금이 무릎을 꿇었다.

전쟁은 끝났으나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피해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국에 끌려갔다가 고향에 돌아온 여성이란 의미의 '환향녀(還鄕女)'라는 말은 인조, 즉 병자호란 이후로 붙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먼저 일차적으로는 전쟁터에 나간 남성들이 셀 수도 없이 희생당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전쟁의 내부 상황을 생각해보면 힘없는 여성들의 처지도 이와 다를 건 없다.

병자호란 전후에 처리해야 될 시급한 문제는 청군에게 강제 납치된 수십만(기록에는 50만) 조선인의 속환 처리였다. 특히 청군은 납치한 남녀노소의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 포로를 풀어주는 대가로 내는 돈)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과 양반의 부녀자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했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해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 문제가 정치•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병자호란)

병자호란 도중 청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환향녀들의 설움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638년 3월 11일 신풍 부원군 장유(張維)가 예조에 단자(單子), 즉 진정서를 보냈다. "제 외아들(장선징)의 처가 청나라 군에 잡혔다가 속환(贖還•몸값을 주고 귀국)했습니다.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습니다. 이제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또 ‘경국대전’에서는 “정절을 잃은 부녀자의 가문은 자손 대대로 문과에 응시하거나 요직에 등용될 수 없었다”고 규정했다. 마지막으로 1638년 ‘인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끊어진 것이다. 억지로 다시 합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사대부 가문들은 환향녀들을 '청군에 잡혀갔다 절개를 잃고 돌아온 여인'으로 간주하여 그녀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고, 오늘날 '화냥년'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삼전도비
환향녀에 대한 처신이 사회적 논쟁거리로 대두되자, 조선에서는 환향녀 처리 문제가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 당시에 사대부 가문의 이혼은 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는 계속 제기되는 이혼 소송을 막기 위해 당시 청나라로 끌려갔던 환향녀들이 "도성 밖 무악재 아래 홍제천에서 몸을 씻고 들어오면 행적을 묻어버린다" 혹은 "과거를 지워주겠다"는 칙령을 내려 여인들이 시댁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일이 없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귀국하는 환향녀들이 홍제천과 같이 조정에서 지시해준, 이른바 회절강(回節江)에 몸을 씻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이미 정절을 잃었다고 여인들에게 낙인을 찍어버린 사대부 가문들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국방이나 외교문제에 대해 업신여기고, 오로지 유교와 학문을 정진하는 것에만 힘을 쏟은 조정과 양반들. 이들에게 종속되어 집 밖에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압받아온 대부분의 여성들.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굴레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그 시대 여성들을 일러 조선의 역사를 으레 한(恨)많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이 떠받들던 유교는 전쟁이 일어나도 변변히 막아내기는커녕 제대로 된 외교를 펼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힘 없는 처자식들을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때로는 도망을 가버린 양반이나 사대부 가문의 가장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반성하기 보다는, 오히려 타국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에게 정절을 잃었다 비난하며 부부의 연을 가차없이 끊어버리려 하였다.

무능력한 양반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여성들에게 덮어씌우려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강화도 수비를 총 책임진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 김경징은 조정의 명을 거역해가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처는 물론 4대에 걸친 여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병자호란은 수많은 백성들의 죽음 이상으로 조선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홍제천 서석개 다리 부근
병자호란은 조선을 지탱하던 성리학을 시험대에 올렸다. 청나라에 잡혀갔다 속환되어 돌아온 수 많은 이 땅의 딸과 며느리와 누이와 동생과 어머니를 달래 줄 어떤 장치도 나라에서는 마련하지 못했다. 다만 전국에 회절강을 두고 거기서 몸을 씻으면 과오를 용서해주겠다는 웃지 못할 령을 내릴 뿐이었다. 회절강에 몸을 씻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멸시와 구박에 끝내 목숨을 끊은 여인이 부지기수란 사실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한 성을 지킴에 용과 호랑이의 비법으로
백리 지역을 지키며 맹수와 같은 용사를 보도다
훌륭한 관리는 임금님의 은덕을 널리 퍼트리고
대장군은 아랫사람을 위엄과 신의로 다스리네
이 땅에서 잠업과 보장을 겸하지만
한가한 날에는 노래하며 투호놀이도 한다네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항상 그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어다

남한산성 행궁에 걸린 시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고 다시는 굴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고 태평성대를 이루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아픔을 참으면서 원통한 마음으로 일생을 살았던 조선의 열녀들을 말하는 듯 하다.  

<김지연 시민기자>(상명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2학년. 교내 영자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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