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은 책쉼터` 대성서점(자양동)
`헌책방은 책쉼터` 대성서점(자양동)
  • 북데일리
  • 승인 2007.02.23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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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서점> 서울 광진구 구의역(자양동) / 02) 453-9850

〈1〉 자전거

[북데일리]오늘은 서울 나들이가 몹시 팍팍하군요. 윗도리 주머니에 찻삯을 넣고 자전거를 달리다가 그만 돈이 휘릭 날아가 버려서, 현금지급기가 있는 일죽까지 내처 달렸고, 일죽으로 가는 길에 뒷바퀴에 구멍이 나서 구멍을 때워야 했습니다. 구멍을 때우고 일죽 버스역으로 가니 제가 타야 할 버스가 쪼르르 나가는군요. 코앞에서 버스를 놓칩니다. 30분을 기다려 다음 버스를 탑니다. 이거 아무래도 무슨 날인가 보다 싶어 서울에 내린 뒤 살며시 자전거를 달립니다. 살며시 달리다가 자양동 〈대성서점〉 간판을 보고는 뚝 멈춥니다. 잠깐 숨을 돌리며 가는 편이 낫겠구나 싶어서. 이런 날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책을 찬찬히 읽어야 사고가 안 날 듯합니다.

〈2〉 책 하나

문을 열고 들어가 바퀴 한 짝을 구석에 기대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 책방 문을 닫으니 조용합니다. 책방에 들어오기 앞서만 해도 찻길을 오가는 자동차 소리며, 길가에 있는 가게에서 내는 소리며 시끄러웠는데, 책방 안은 또 다른 세상입니다.

조용한 느낌을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책꽂이를 슥슥 훑습니다. 책들이 퍽 바뀌었군요. 오래도록 안 팔린 시모음을 모두 버리신 듯. 그 책들이 쓸모가 없거나 읽힐 값이 없지는 않겠으나, 너무 오래도록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 다른 새로운 헌책이 깃들 틈이 없으니까요. 헌책방에서도 한 가지 책이 오래 자리를 지키면 지킬수록 새로운 헌책이 자리를 잡을 수 없고, 새로운 흐름이 이어가지 못합니다.

새로운 흐름이 없게 되면, 나날이 찾아올 단골이 줄고 꾸준히 찾아올 책손도 줄겠지요. 그래서 제아무리 값어치 높은 책이라 해도 오래도록 안 팔리면 ‘버려야’ 합니다. 아니면 이 책을 알아보는 임자한테 ‘헐값에 넘기’든지요. 퍽 소중하다고 할 만한 책을 헌책방 임자가 꽤 싼값에 팔 때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그 책이 아무리 소중하고 드문 책이라 해도 ‘팔려야 값을 하는’ 만큼, 안 팔리면 짐이거든요. 집구석에 금송아지가 백 마리 있으면 뭐하겠어요. 하나라도 팔려야 제몫을 하지요.

<교육사상사>(백산서당,1985)라는 책이 보입니다. 흐흠. 어려울 듯한데. 집어? 말어? 한참 망설이며 책을 쥐었다가 놓았다가 되풀이. ‘다 못 읽어도 좋다. 한 쪽이라도 읽어서 내 마음을 움직이는 대목이 있으면 되지 않겠어?’ 하고 생각하며 꾸욱.

<교육사상사>는 교육이론을 다룬 책이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틈을 내어 조금씩 속깊이 읽는다면 우리네 교육 틀거리와 사회 틀거리를 두루 헤아리는 눈길을 추스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싶어요.

.. 국민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근대 학교교육도 노동용구의 발달, 그것에 대응하는 노동능력 발달의 요청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다. 그뿐 아니라 근대 공교육제도의 성립 자체가 자본제적 기계제 생산의 급속한 발전, 더 나아가 제국주의 경쟁의 격화 등의 조건에 의해서 일정한 지적ㆍ기술적 능력을 갖춘 노동자를 대량 공급해야 한다는 필요에 따른 것이다 .. 〈16쪽〉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사회 틀은 민주주의라 하지만 경제 틀은 자본주의입니다. 그래서 이 자본주의 틀에 걸맞게 교육도 제도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같은 입시지옥을 만들어 내고, 이런 입시지옥을 더 골 깊게 짓누르는 교육은 자본주의 틀거리에서는 자연스러운 길이라는 소리군요. ‘대졸자를 대량 공급해서 좀 더 싼값으로 일을 시키며 도시 경제를 돌리자’면 말입니다. 그래, 입시지옥을 없애는 길은 오직 하나, ‘학교를 버리는’ 길뿐이구나 싶군요. 배움이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얻을 수 있지 않으니까요. 우리한테는 독학이 있고 야학이 있고 검정고시도 있습니다. 졸업장 없이도 얼마든지 학문을 할 수 있고 대학교에 갈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학교 아닌 곳’에서 배움을 얻고자 선뜻 나서는 뜻있는 젊음이 보이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이 입시지옥은 어쩔 수 없이 더 탄탄해지고 뿌리깊이 박힐 뿐이라고 느낍니다.

..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사적 소유제로 규정된 사회질서에 인간을 동화시킬 필요가 있으므로, 이에 따른 교육기능이 부여된다. 가령 입신출세와 경쟁ㆍ근면ㆍ능률ㆍ절약ㆍ공부 등의 의식형성, 더 나아가 사회적 모순의 과학적인 인식을 가로막는 이데올로기 교육, 혹은 잔존하고 있는 봉건적 의식을 이용한 보수적인 교육 등 어느 것이나 자본주의 체제의 강화를 지향하여 직접ㆍ간접으로 노동자의 계급의식의 성장을 억누르고 노동자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대응책으로서 교육이 조직된다 .. 〈17쪽〉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무섭습니다. 무시무시하군요. 우리들이 저마다 다 다른 생각과 모습과 꿈과 마음을 가꾸면서, 저마다 자기한테 가장 알맞고 즐거울 일과 놀이를 찾도록 이끄는 교육은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게다가 이런 자본주의 교육은 벌써 튼튼히 뿌리를 내렸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이런 자본주의 교육 틀거리에서 이익을 얻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자기도 이익을 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런 판에 ‘우리 마음을 살찌우는 책 하나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찾아서 읽기’란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무슨 값어치가 있을까요. 아니, 아무런 이익(돈-이름-힘을 얻는 이익)이 될 수 없으니 그냥 지나치겠지요. 그냥 지나치기만 하면 그나마 낫겠지만 얕잡아보겠지요. 깔보겠지요. 비웃겠지요.

그러니까 책 읽어 마음 살찌우자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논술에 도움이 되도록 책을 읽자는 소리나 나오겠지요. 책은 논술 때문에 읽는 게 아닌데. 책은 논술 점수 많이 받도록 하자고 펴내지 않는데.

.. 현실적으로는 보편성이라는 명목 아래 부르조아지의 권리의 정당성을 봉건귀족에게 승인시켜 자기의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주장한 것이었다. 계급으로서의 노동자의 존재, 그들의 고유한 이해관계는 처음부터 무시되었다 … 그러나 부르조아지가 자기의 계급적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노동대중이 미숙하고 독자적인 계급으로서 성장하지 않은 단계에서만 가능하며, 노동자가 성장함에 따라서 파탄할 운명에 있었다 .. 〈20쪽〉

그러니까 교육개혁을 안 하려고 하는군요. 이러니까 아이들을 교과서에 가두고 학교에 묶어 놓으려 하는군요. 학교 밖으로 눈길을 못 돌리게 하고, 오로지 시험문제만 풀도록 하는군요. 풋풋하고 싱그러운 아이들이 어둡고 케케묵고 칙칙한 생각으로 자기 마음과 머리를 가득 채우는 한편, 제도권에서 집어넣는 지식을 잔뜩 껴안고 있어야 ‘바보’가 될 테니까요. 그래야 대통령 선거든 국회의원 선거든 시장ㆍ군수 선거든 엉터리한테 표를 주거나 아예 투표도 안 하도록 바람잡을 수 있겠지요. 그래야 노동자가 일한 대가를 제대로 못 받는 뒤틀린 사회 얼거리를 제대로 파헤치지 못하게 할 테지요. 슬픕니다.

.. 기계문명의 비참한, 조직 안의 비개성화, 매스컴 공세, 핵전쟁의 파멸적인 공포 등은 확실히 어느 것이나 인간의 비참한 현실이기는 하지만 단지 그 비참함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인간해방의 소망이 실현되지 않는다 .. 〈22쪽〉

오늘날 우리 사회 교육은 아이들한테 ‘우리 사회 비참함’만을 알려주고 말하게 하는구나 싶습니다. ‘전쟁이 좋아요!’ 하고 외치는 아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안 일어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할 줄 아이는 없고, 대답을 하더라도 실천으로 옮기는 아이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아이들뿐인가요? 어른은 더 그렇습니다. 지식인은 더 볼썽사납습니다. 모두들 제도권에 매여 있으니까요.

학교에 매여 있고 일터에 매여 있고, 친인척 관계에, 돈에 이름에 힘에 매여 있으니까요. ‘쓰레기를 줍자!’는 말도 그렇지요. ‘환경운동’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으레 ‘쓰레기 줍기’를 떠올리는 아이들이요 젊은이잖아요. 지율 스님이 천성산을 지키려는 일이 환경운동임을, 환경운동을 넘어 평화운동임을, 평화운동임을 넘어 평등과 통일과 조화와 사랑을 함께하려는 움직임을 못 느끼는 우리들입니다.

〈3〉 학교교사 눈높이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산. 1997)라는 책이 보입니다. 으흠. 더 망설여집니다. 이 책은 더 어려울 듯한데. 그래! 모르겠다! 어쨌든 집고 보자. 읽다가 잠이 오면 그대로 잠들지 뭐.

<이경수-가슴으로 크는 아이들>(푸르메. 2006)리는 책도 보입니다.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책. 출판사 ‘푸르메’는 새로 생긴 1인 출판사. 이곳에서 처음 낸 책이 퍽 좋았다고 느끼기에 이 책도 골라듭니다.

..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소. <에밀>의 저자인 그는 자신의 자식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냈답니다. 아버지로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습니다. 노동자의 세상을 외쳤던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깃발을 높이 세웠던 그는 자신의 집에서 오랜 세월 가정부로 일했던 여인에게 봉급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완벽한 노동력의 착취였습니다. 언행일치는 위대한 사람들조차 실천하기 어려운 숙제 같은 건지도 모릅니다 .. 〈162?163쪽〉

하지만 <가슴으로 크는 아이들>은 몹시 답답하군요. 책이름은 그럴싸하지만, 글쓴이가 무슨 ‘가슴’을 이야기하려는지, ‘아이들’을 어떤 눈길과 눈높이로 바라보고 껴안으려 하는지 제대로 안 보입니다. 아니, 어설피 보이고 엉뚱하게 보입니다.

역사교사라고 하는 분인데, ‘-답니다’라는 말투를 함부로 써도 되는가 모르겠군요. 루소가 살던 때 고아원이나 아이키우기와 2000년대 오늘날 한국 사회 고아원과 아이키우기가 같을까요? 그리고 마르크스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분은 얼마나 잘 알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는지요. 마르크스는 죽는 날까지도 살림이 제대로 핀 적이 없이 고달프게 자기 사상 마무르기에 바쳤고, 언제나 수배자 몸으로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마르크스를 걱정한 벗 엥겔스가 있었기에 그나마 먹고살 수 있었지요.

마르크스는 자기 자식들을 가르칠 돈이 없어서 늘 엥겔스한테 신세를 졌고, 아이들 병을 고칠 약을 살 돈이 없어서 자식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마냥 바라만 보아야 했습니다. 마르크스 아내도 모진 가난에 몸이 나빠져서 끝내 병으로 죽었고요. 가난한 마르크스 살림을 알고 기꺼이 몸을 바친 ‘가정부’는 ‘마르크스 집안에 들어가면 돈을 한 푼도 못 받을 줄 알고’ 들어간 사람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가정부가 아닙니다. 마르크스 집안에서는 ‘똑같은 한 식구’로 살았어요. 그런데 이이는 참으로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군요. 역사교사가 이럴 수 있습니까? 역사교사가 역사 이야기를 이렇게 함부로 뇌까려도 되는가요.

.. 제 자식 독서 교육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런 말씀 드리기 민망합니다만, 여러분의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도록 지도해 주세요. 학원 여러 곳 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이들 독서입니다. 어릴 때의 독서는 머리와 가슴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평생을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자양분이 됩니다. 대학 입시에서 논술 평가가 강화된다고 하는데, 뭐니 뭐니 해도 논술의 기본은 독서입니다 .. 〈18쪽〉

책읽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무슨 책을 어떻게 왜 읽느냐에 따라서 나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글쓴이는 정작 중요한 대목인 ‘무슨’ 책을 ‘어떻게’ ‘왜’ 읽어야 하는가를 밝히지 않습니다. 아니, 못하겠지요. 글쓴이 집 아이들이 책읽기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글쓴이부터 책읽기와 거리가 멀다는 뜻이거든요. 아이들한테 굳이 책읽기를 가르치지 않아도, 부모 된 사람들이 즐겨 마음을 살찌우는 책을 하나하나 골라서 읽으면, 아이들도 부모를 보며 배우고 따르기 마련이에요.

.. 아, 참!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아침에 자가용으로 아이 등교시킬 때, 교문 안까지 들어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식을 조금이라도 덜 걷게 하고 싶은 마음에 교실 가까이 차 몰고 오시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 위험합니다. 학부모끼리의 접촉 사고도 걱정이지만, 걸어서 등교하던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운전 서툰 엄마들이 차 후진시키는 걸 보면, 조마조마합니다 .. 〈29쪽〉

요새는 학교까지 차를 몰고 아이를 데려다주는 부모가 많은가 보군요. 고등학생쯤 되는 아이들이라면 30?40분 거리는 넉넉히 혼자 걸어갈 수 있고, 조금 멀다면 버스를 타고 가도 됩니다. 그런데 왜 자가용으로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다주지요?

교사 된 사람이라면, 부모들한테 ‘아이들을 자가용으로 데리고 오지 마셔요’ 하고 말해야지 싶습니다. 또한, ‘운전 서툰 엄마들 차 후진’ 걱정하기보다는, ‘왜 자가용을 그렇게 몰려고 하는가’를 따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한테 자전거를 타서 학교를 오가라고, 걸어서 학교 오가는 길은 이것저것 보고 느낄 거리가 많아 즐겁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까요.

〈4〉 사람

헌책방 〈대성서점〉 문을 밀고 들어오는 손님들이 드문드문 있습니다. 기독교 책을 찾는 분이 있고, 참고서 사러 온 어머니와 아들이 있고, 홀로 참고서를 찾는 학교옷 입은 학생이 있습니다. 안쪽 깊숙한 데까지 죽 둘러보고 나가는 사람이 둘 있었으나, 나머지 모두는 문가에서만 맴돌다 나갑니다. 다들 저보다 늦게 〈대성서점〉에 들어와 저보다 일찍 〈대성서점〉을 나섭니다.

이제 저도 움직여야 할 즈음. 책 세 권을 아저씨한테 건네어 책값을 치릅니다. 아저씨는 책값을 퍽 싸게 부릅니다. 그냥 싸게싸게 주시는 듯합니다. 하지만 참고서 값을 부르는 모습을 보면 꽤 높은 값이 아닐까 싶은데(그러나 다른 헌책방보다 참고서 값도 싸게 부르지 싶습니다), 그 높다고 느껴지는(저한테는) 책값을 스스럼없이 치르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깎아 달라고 하는 분들도 얼마 못 깎고 부르는 책값을 거의 그대로 치릅니다. 언제였더라, 〈대성〉 아주머니가 그러시더군요. ‘처음 책값 부를 때부터 뺄 만한 값은 다 빼고 부르기 때문에 더 빼 드리지 못한다’고.

그러니까 헌책방 〈대성서점〉은 장사하는 솜씨가 없는 셈입니다. 처음에 좀 비싸게 부르고 슬쩍 깎아 주면 사람들이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안 합니다. 처음부터 아예 ‘책방에서 남길 만큼만 딱 잘라서’ 책값을 부릅니다. 그러니, 〈대성〉은 더 많이 이익을 남길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높게 부르는 값을 곧이곧대로 치르고 가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러나 〈대성〉은 처음부터 가장 낮은 값으로 불러 주기 때문에, 이곳에서 책을 사는 사람은 ‘좀 깎아 주지. 인심도 나쁘구려’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참 얄궂은 노릇이지요. 3000원짜리 책을 3000원에 팔면 인심 사나운 사람이 되고, 3000원짜리를 5000원 부른 뒤 4000원이나 3500원으로 깎아서 팔면 인심 좋은 사람이 되니까요.

아저씨한테 꾸벅 절을 하고 책을 가방에 넣습니다. 떼어 놓은 바퀴를 들고 밖으로 나와 자전거에 붙입니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혜화동에나 가 볼까.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습니다. 문득, 헌책방 〈대성서점〉 책값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 헌책방 〈대성서점〉 책꽂이를 찬찬히 둘러볼 줄 아는 사람, 헌책방 〈대성서점〉 아저씨와 아주머니 거친 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요. 아니, 있기나 할까요.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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