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데일리]한국인의 아파트에 대한 열광적 태도를 한 프랑스 학자가 주목했다. 주인공은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프랑스의 젊은 연구자 발레리 줄레로. 1993년 처음 한국에 방문한 그녀는 한국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보고 놀라 이를 연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동료 연구자들 사이에서 “왜 한국의 아파트냐”는 회의적인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한국에서의 조사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땅은 좁고 인구가 많다는 이유로 한국의 아파트 현상을 여지없이 받아들여 온 한국인들에게 그녀는 당연한 것을 이해 못하는 순진한 외국인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이 같은 상식과 편견에 도전해 힘겹게 이뤄낸 결과물이 책 <아파트 공화국>(후머니타스. 2007)이다. 한국의 아파트에 대해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한 저자는 ‘아파트에는 누가 사는가?’라는 제목 하에 이색적인 취재 내용을 실어 눈길을 끌고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
▲도시중산층의 전형, 김모 씨
50대 초반의 김모씨는 전업주부다. 그녀의 남편은 대기업 계열회사의 부사장이고 두 자녀를 두었다. 김 씨의 남편은 엔지니어 자격증을 취득한 후 회사에 입사했고 1980년대 중반에는 유럽지사장으로 일했다. 귀국하면서 1980년대 초에 완공한 강남의 아파트 한 채를 구입했다. 방 네 개짜리 50평 아파트였다. 설문지에 기록된 이 가족의 월수입은 300만원을 초과했다.
김 씨의 남편은 골프를 즐기고 김 씨는 헬스클럽에 등록하여 일주일에 두세 번 수영강습을 받고 사우나를 이용한다. 그녀는 백화점을 즐겨 찾고 화장품은 동서양의 유명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 샤넬, 이브 생 로랑 등을 사용한다. 남편의 차는 자신에게 ‘실용적이지 않아’ 소형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다. 아파트는 현대적인 최신 시설을 갖추었고 대용량의 냉장고 두 대를 비롯하여 대형 평면 텔레비전이 거실을 차지하고 부부의 침실에도 작은 텔레비전이 놓여져 있다. 식당에 놓인 장식장에는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온 코냑, 고급 위스키 등 양주병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키치 풍의 유명 메이커로 가득한 실내 장식은 필자가 방문한 서울 중산층 가정의 전형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 “여기 아파트가 제일 비싼 거지. 중산층 동네니까요” 김 씨는 인터뷰 도중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서초구의 비싼 아파트 가격에 대한 언급은 본인이 중산층에 속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음을 암시했다.
▲옛 지방 양반가 출신 장모 씨의 가족
60대 미망인 장모 씨는 금리 생활자로 양반을 자처하는 지방유지 가문출신이다. 그녀의 남편은 중소기업 사장이었고 1960년대 태어난 자녀 2남2녀는 모두 명문대를 나온 고학력자들이다. 시골에서는 275평짜리 한옥과 땅을 가지고 있었고 운전기사와 집안일을 돌보는 고용인 몇 명, 밭일을 하는 일용직 일꾼들을 데리고 있었다. 1980년대에 남편을 여읜 후 사업을 정리하고 땅을 팔아 서초구 아파트단지에 18평 아파트 두 채를 구입해 딸들에게 주었다. 시골집은 200평 이상 소유주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75평을 제외한 나머지 소유분을 두 아들이 나누어 가졌다. 장 씨는 1990년대에는 보유하고 있던 공장 매각금으로 자신을 위해 동작구에 있는 44평형 아파트를 구입, 둘 째 딸과 두 아들이 함께 살고 있다.
장 씨 가족은 그녀의 남편이 생산적 자본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고전적 의미의 구중간계급에 속했다. 장 씨는 설문지에서 월수입이 120만원에서 200만 원 선이라고 답했다. 평균이하의 수입규모로 보면 그녀를 도시중산층이 아니라고 범주화 할 수 있으나 그녀 자신은 중산층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아파트가 두 채인 장 씨는 시골에 한옥 한 채와 자동차도 소유하고 있다. 아파트의 인테리어는 연못이나 술병이 가득했던 김 씨 집보다 소박했다. 김 씨처럼 장 씨도 여가 생활을 즐기며 고전무용이나 가야금을 일주일에 몇 번 씩 배우고 있다. 한국적 전통에 관련된 이 두 가지 취미 활동은 장 씨의 생활방식이 김 씨보다는 서구화가 덜 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회계층 상승 중인 이모 씨 가족
1960년대 중반에 태어난 이모 씨는 지방 대도시 출신으로 그곳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왔다. 1980년대 후반에 그녀는 서울의 한 회사에 근무했다. 본인의 저축과 가족의 도움으로 1990년대 초반 작은 상점을 연다. 사업은 수월하게 진행되어 1990년대 중반까지 유지했으나 결혼과 두 자녀의 출산으로 일을 접었다.
결혼 전에 이 씨는 강남구 근처 아파트단지의 10평대 아파트에 세 들어 살았다. 결혼 후에는 마포구의 재개발단지 30평대 아파트에 전세를 얻었고 1990년대 중반 일산의 34평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했다. 이 씨는 인터뷰 중 “우리가 도시 중산층이냐고요? 글쎄, 우리가 이 33평 아파트를 갖고 있고 차 한 대 갖고 있고... 그래, 한편으론 그런 말도 할 수 있지”라고 답했다. 월수입 300만 원 이하라고 적었지만 자신이 중산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맨 먼저 아파트 소유를 꼽았다.
신도시로 이사한 후 이 씨는 자녀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김 씨나 장 씨에 비해 그리 활동이 많지 않은 것은 나이 어린 두 자녀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며 일상생활의 제약은 재정적인 상황보다는 결혼 생활의 주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휴가 기간에 두 사람은 자녀들을 친정 부모님께 맡기고 여행을 떠난다. 유럽을 몇 차례, 동남아지역을 몇 차례 다녀왔다. 이 씨 부부는 신중간계급의 범주 안에서 신분상승 중인 젊은 세대라 할 수 있다. 이전 세대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해외여행 같은 여가 활동 등은 새로운 세대의 생활방식을 잘 타나내고 있다.
▲아파트에 거주하지 않는 박모 씨 가족
40대의 박모 씨는 마포 토박이 동네에서 한 상점을 경영하고 있다. 이 동네에는 1995년에서 2000년 사이 합동 재개발 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그녀의 남편은 중소기업체의 사원이고 두 사람 모두 대학 졸업장은 없으며 어린 자녀 둘을 두고 있다. 박 씨는 1970년대 중반 결혼 이후 남편과 함께 상경, 김포공항 근처 강서구의 개인주택에 자리를 잡았다. 박 씨는 전업주부였고 상점을 연 1990년대 초반까지 자녀들을 돌보았다. 마포에 상점을 가지고 있던 남편의 삼촌이 은퇴를 하며 임대를 제의했고 이를 곧 승낙했다. 상점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해 이사를 했고 함께 사는 시어머니가 가게 일을 도와 쉬는 날 없이 아침 8시부터 밤10시까지 일을 했다. 이들은 벽돌로 지은 다세대주택 18평 전세에서 살고 있다.
이모 씨의 남편처럼 박 씨의 남편도 중소기업의 사원이지만 그들의 월수입은 120만원에서 200만원 사이로 중산층에 속하지 못한다. 게다가 18평에 다섯 식구가 거주하는 주택 여건은 앞서 소개한 사례들에 비해 열악하다. 박 씨는 앞서의 세 사람과 달리 자신이 하위 계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박 씨는 자신보다 생활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이주해옴으로써 동네가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더 잘사는 집 아이들과 한 학교를 다니게 될 아이들도 걱정이다. “남들을 밑으로 쳐다보는 거예요”라고 아파트 주민들을 비난하며 그들에 대한 열등의식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박 씨는 아파트를 도시 중산층의 주택 형태로 간주한다. 이러한 박 씨의 생각은 도시 중산층에 끼지 못한 계층들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저자 발레리 줄레로는 이상의 네 가지 사례를 소개하며 “주택의 장소와 형태, 생활방식 등이 사회계층을 확인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주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도시 중산층에 속하는 김모 씨와 장모 씨는 자신들의 사회적 계층을 정당화하려는 견해를 피력하지 않았다. 반면, 계층 상승 중인 이모 씨는 소속 계층을 재확인하기 위해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 시켰다. 박모 씨 또한 소득의 크기보다 주택의 형태와 거주 장소가 도시 중산층 소속 여부를 확인해 준다고 생각했다.
책은 “주택의 형태, 장소, 생활방식 등 사회계층을 확인시켜 주는 요소들이 상위계층을 향한 욕구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에만 해당하는 사실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도시 중산층을 의미하는 가장 함축적인 상징으로 고층 아파트가 자리 잡았다는 것은 분명 특이한 점”이라고 전한다. 이는 한국과 프랑스에서 주택에 결부된 상징을 구별하는 핵심 요인. “프랑스에서는 작고 소박한 것이라도 단독 주택이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분석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
발레리 줄레조는 대단지 고층아파트로 빛나는 도시가 된 한국이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프랑스와는 정반대로 ‘중산층’이라 불리는 상층 중간계급이 집단적 거주 형태로 자리 잡은 한국 아파트의 현실과 운명 역시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아파트 공화국>은 출간 된 해 프랑스 지리학회가 수여하는 가르니에 상을 수상했다. 저자 발레리 줄레로는 찜질방이나 노래방과 같은‘방’ 문화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사회적 친교를 연구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