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거처는 왜 이리도 쓸쓸할꼬
시인의 거처는 왜 이리도 쓸쓸할꼬
  • 북데일리
  • 승인 2005.08.2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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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면(馬面)이라 부르느니 차라리 청마(靑馬)로 고쳐라

글읽기를 지나치게 즐기는 일을 서음(書淫)이라 한다. 괴테는 "만 권의 책을 읽었어도 육체는 서럽다"고 했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를 통해 만인에 관한 시를 쓰기를 염원하며 20권째 시를 짓고 있다. 글을 읽거나 쓰거나 육체가 서러운 까닭은 인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그립지 않으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니까.

이기철 시인이 펴낸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2005. 문학동네)는 그가 만난 시인 21명에 대한 시로 그린 초상화다. 그는 자신이 `만난` 시인들만을 오롯이 담았다. 풍문은 모두 뺐고 실증만이 오로지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허구와 상상으로 씌어진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영문학자 정인섭이 긴 얼굴을 빗대 "마면(馬面), 마면" 부르니, 홍사용이 청마(靑馬)라 고쳐 불러 유래한 유치환의 아호부터, 포항 죽도 시장에서 술집을 순례하다가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불렀던 영원한 소년 시인 신경림, 칠포해수욕장에서 "하늘이여, 비를 내리소서"를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해 긴 가뭄 속 시인들을 경건케 했던 고은, 강연회 도중 발생한 말실수에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내 이럴줄 알았지"하며 재치로 웃어넘기던 황동규, 대구 문화동 청운장 여관으로 시 두 편을 들고 오라는 호출을 받아 첫 대면한 대시인 박목월 등과의 추억 등이 촘촘히 박혀있다.

커피를 사랑한 김현승과 보행하는 인명사전 임영조

그는 소년 시절 시간이 나면 김현승의 `플라타너스`을 외웠다. 대학 시절엔 `시문학`에 시를 몇 번 투고했다. 그때 작품 평을 하던 김현승과 지면으로 만난다. 칭찬보다는 언제나 매서운 꾸짖음을 들었다.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이 대시인에게 작품을 보내고 싶어져 몇 작품을 보낸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게 답장을 받는다. 유명시인으로부터 받은 첫 편지엔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니 정진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그 편지를 오래오래 지니고 다녔다.

그는 군 제대 후 느닷없이 수색동 김현승의 집에 찾아간다. 손님을 맞은 김현승은 묻지도 않고 커피물부터 끓였다. 그리고서 대뜸 그에게 물었다. "대구에 가면 대구역 앞에 산장다방이라고 있지요?" 가난뱅이였던 그가 다방 이름을 알 리가 없었다. "강연 차 그 집엘 들렀는데 그 집 커피가 그래도 괜찮아요." 그때 퍼뜩 생각난 건 `아 시인의 아호가 다형(茶兄)이었지`였다. `절대고독`의 시인 김현승은 커피를 정말로 깊이 좋아했다. 그리고 커피향 같이 그윽한 순수의 시를 세상에 남겼다.

이기철 시인이 허교하고 지냈던 유일한 문단 친구는 2003년 작고한 임영조 시인. 그가 기억하는 임영조의 기억력은 놀랄 정도였던 모양이다. `한 번 본 것, 한 번 들은 것은 거의 놓치지 않는다. 날짜와 시간, 장소까지 거의 다 정확히 기억한다.` 임영조 시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떴을 때 그는 `임영조`라는 제목의 시를 한편 바쳤다.

`그 질그릇 같은 충청도 사투리가 갔다/ 두루마리 같던 인정이 갔다(중략)/ 우리 시대의 문단야사가 갔다/ 보행하는 인명사전이 갔다(중략)/ 막소주 같던 그가 갔다`

그는 키 150센티미터에 체중 34킬로그램인 김규동 시인을 보며 조각가 자코메티의 조소(彫塑) `철사인간`을 떠올린다. 여기에도 작고한 시인 임영조의 말이 덧붙여진다. "우리 문단에서 라이트급 1인자는 김영승이고 두 번째가 김규동이고, 그 다음이 김춘수쯤 될까."

3. 김춘수 "김수영이만 아니었으면 나도 현실적인 시 좀 썼을텐데…"

작년 11월 김춘수 시인이 눈을 감았다. 그때 문학평론가 유종호가 동아일보에 김춘수 시인에 대한 글을 실었다. `김수영과 더불어 광복 후 가장 문제적이며 대조적인 시인`이라는 평가가 포함되었다. 이기철 시인이 김춘수에게 직접 들은 말은 이 평가를 확인해준다.

"김수영이 그렇게 큰 목소리로 을러대지 않았으면 나도 현실적인 것을 좀 썼을 건데 그 사람 때문에 나는 더 현실을 피해갔던 것 같다."

이 밖에 이 책에는 `문인에게 급한 일이 생기면 밤중에라도 뛰어나올 사람`이었던 오탁번,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노래했던 설악의 시인 이성선, 나이보다 젊게 사는 흰구름 수녀 이해인, 웃음과 해학이 넘치는 황금찬, 영원히 사랑받는 `조선의 여인상`인 유안진 등의 기억도 각별하다.

이해인 수녀의 말처럼 이 책은 `자연스럽고 깊이 있는 한 권의 시인론이며 문학보고서`다. `천상 시인`일 수밖에 없는 수많은 시인들의 면모는 그들이 지어낸 시어들처럼 하나같이 순수하고 영롱하다. 제 아무리 시인들의 거처가 쓸쓸할지라도.

(사진 = 시인 김춘수, 김현승, 임영조) [북데일리 박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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