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詩` 윤제림 `사랑을 놓치다`
`첫사랑의 詩` 윤제림 `사랑을 놓치다`
  • 북데일리
  • 승인 2005.08.2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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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터넷게시판에서 첫사랑에 관한 좋은 시를 뽑는 투표를 하였는데, 윤제림 시인의 `사랑을 놓치다`(문학동네)가 제일 많은 표를 얻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시가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기찻길에 서서 자꾸 과거로 돌아가고만 싶은 남우 설경구와 새침하고 도시적인 여우 송윤아가 ‘광복절특사’ 이후로 몇 년 만에 상봉한다고 합니다.

사실 많은 소설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지만 시를 영화로 만든 경우는 드물지요.

심지어 영화 속의 시인들은 ‘넘버3’의 랭보처럼 여자나 후리는 `껄떡쇠`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 유하 시인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장정일 시인의 ‘301 302’,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 정도가 시를 영화로 만든 작품인데요, 무엇보다 시의 묘사와 진술이 소설보다는 영화화하기가 쉽지 않은 때문이겠지요.

그럼 윤제림 시인의 ‘사랑을 놓치다’를 한번 읽어볼까요.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 그대는 번번이 먼길을 빙 돌아다녀서 /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 또 한 생애엔, /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 모르고 잤습니다. / 명사산 달빛 곱던, /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후후. 이렇듯 사랑은 방죽에서 물고기를 잡듯 힘만 잔뜩 쏟아 붓다가 나중에는 언덕빼기에 큰대자로 뻗어서 보는 파란하늘 같은 것은 아닐까요.

하여 나희덕 시인은 ‘마른 물고기처럼’에서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 힘겹게 파닥이고 있었다, 나는 / 얼어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고 연민의 부질없음을 장자의 ‘대종사’의 글귀를 빌어 노래했지요.

아무튼 안타까운 사랑은 사람의 눈을 멀게도 하는 가 봅니다.

윤제림 시인은 ‘눈먼 사랑노래’에서 “천년의 소식을 듣고도 제자릴 못 뜨는 저 용문산 / 은행나무처럼, 나를 옴쭉도 못 하게 하는 그 기별이 / 시방 어디만치 오는가 알고 싶다”며 소리라도 들을 수 있게 귀걸이를 달아달라고 애원하기도 합니다.

그럼 첫사랑의 그는 어찌되었을까요. 시인은 보은군 내속리에서 엇갈리고, 돈황여관에서 비껴간 사랑을 ‘옛사랑’에서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일을 어쩐다냐, 그 역시 눈이 멀었습니다.

"이젠 앞도 못 본다지, / 점이나 봐주며 혼자 산다지, / 처녀철학관, 간판은 걸었어도 / 창문 하나 못 고쳤구나. / 예전처럼 꼭 그만큼만 열린 창, / 담쟁이만 지붕을 넘었네. / 기다리는 사람 서에서 오느니 / 귀인이 동에서 오느니 / 남의 길 짚어주고선, / 사람마다 붙잡고 부탁한다지 / 못 보던 남정네 하나 보이거든 / 일러주세요, 네. / 전에 살던 마을에 갔었네. / 그 집 앞까지 갔었네.“

옛사랑은 찾지 말랬다더니 똑 그 짝 났네요. 그러나 사랑은 가끔, 아니 많이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만,

"살 찢은 칼이 칼끝을 숙이며 / 정말 미안해하며 제가 낸 상처를 / 들여다보네. / 칼에 찢긴 상처가 괜찮다며 /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칼을 / 내다보네."라고 시인은 ‘사랑’을 말하며 그 집 앞 골목을 쓸쓸히 걸어 나옵니다.

`21세기 전망` 동인의 맏형이라는 윤제림 시인, 아무렇지 않은 듯 뱉어내는 그의 사랑노래가 더욱 안타깝게 가슴을 적십니다.

(사진 = 윤제림과 영화 `사랑을 놓치다` 한장면)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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