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 오닐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극작가로 평가받는 아서 밀러의 대표작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은 바로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다 .. <장영희-문학의 숲을 거닐다>(샘터. 2005) 44쪽
[북데일리] 중학교 3학년 때라고 떠올립니다. 그때쯤부터 학원에 다니며 영어를 배웠습니다. 고등학교를 앞두고 다닌 학원이고, 영어를 좀 더 배워야겠다 싶어서 다녔습니다. 이때 가르친 강사는 여러 가지로 피를 뽑듯 정성이었는데, 그렇게 해야 자기도 인기를 얻으며 먹고살 수 있었겠지요. 그만큼 온힘을 다했다고 볼 수 있고요.
┌ Death of a Salesman
├ 세일즈맨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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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원 죽음
├ 회사원 죽다
├ 회사원이 죽다
├ 죽고 만 영업사원
├ 죽어가는 영업사원
└ …
그때 영어 강사는 여러모로 제 마음에 남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먼저 ‘성문종합영어’에 나오는 따온 글(지문) 100가지를 외울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교과서나 참고서 말고 영어로 된 소설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이 강사가 한 말을 마음에 새기며 성문종합영어를 한 장씩 뜯어서 외우고 찢어버리곤 했고, 책방을 다니며 부지런히 다니며 영어로 된 소설책(페이퍼백)을 사서 읽곤 했습니다(영어 소설책을 읽은 때는 고2부터. 중3 때는 영어 동화책을 보고. 이 강사한테 여러 해 배웠거든요).
한편, 언젠가 강의 때,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책이름을 어떻게 우리 말로 옮기겠느냐고, 이 책을 쓴 사람이 왜 ‘a’를 썼느냐, ‘the’를 쓰면 어떻게 달라지느냐, ‘die’가 아닌 ‘death’를 써서 책이름을 붙인 까닭은 무엇이겠느냐, ‘세일즈맨’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냐, …… 여러 가지를 따지면서, 영어를 우리 말로 옮길 때 너무 가볍게 옮겨서는 안 된다고, 우리보고 나중에 이 책이름을 재주껏 풀어 보라는 숙제를 내주었어요.
‘한 세일즈맨의 죽음’,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처럼 옮기기도 했던 《Death of a Salesman》. 요즘은 어떤 책이름으로 흔히 쓸라나.
한동안 머리를 굴리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말이 안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잊어버렸고, 여태껏 이 책이름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지난 일이 떠오르면서, 그때 영어 강사를 했던 분이 참 좋은 숙제를 내주었구나 싶고, 이 숙제 덕분에 우리 말과 번역 문제를 더욱 깊이 살필 수 있어 고맙기까지 합니다.
┌ 회사원이 죽다
└ 죽은 영업사원
제 생각입니다. 제가 미국 문학을 공부해서 아서 밀러란 분 책을 우리 말로 옮겼다면, 요 두 가지 책이름 가운데 하나로 잡았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회사원이 죽었네”처럼 말끝을 달리할 수도 있을 텐데, 이건 나중 문제고, 미국에서 ‘세일즈맨’이라고 하는 그 사람,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헤아린다면, 우리 말로는 ‘회사원’이 어울린다고 느낍니다. 소설 주인공은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거든요. 다른 한편으로는 늘 회사 밖으로 나돌면서 영업을 하기 때문에 ‘영업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회사를 다니는 이들은 으레 이 두 가지 말, ‘회사원-영업사원’이라는 말을 쓰고, 우리들도 이런 말로 가리킵니다. 그래서 ‘세일즈맨’은 이렇게 풀어내는 편이 좋으리라 봅니다.
다음으로 ‘죽음’이라는 말인데, “회사원의 죽음”처럼 쓸 수도 있으나, 번역이란, 옮기는 나라밖 말과 문화뿐 아니라, 옮겨내는 우리 말과 문화를 함께 살펴야 하는 일입니다. “(무엇)의 (무엇)”처럼도 얼마든지 쓸 수 있겠지요. 그래서 처음 이 소설을 옮길 때부터 여태까지도 “세일즈맨의 죽음”처럼 썼다고 느낍니다. 그러면 “(무엇)의 (무엇)”으로 쓰는 말투가 알맞게 쓰는 우리 말투일는지요.
요즘 들어 더더욱 토씨 ‘-의’가 곳곳에 많이 쓰이지만, 이렇게 많이 쓰이는 토씨 ‘-의’가 알맞을는지요. “아버지의 꿈”보다는 “아버지 꿈”이, “초록의 공명”보다는 “초록 공명”이 우리 말투와 가깝고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회사원 죽음”처럼 써 볼 수도 있어요. 이 이름도 좋다고 느낍니다.
여기서 번역을 끝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말 빛깔과 문화를 헤아린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편이 좋다고 느껴요. 지난해부터 읽어서 내일이면 마지막 쪽까지 다 읽을 책 가운데 하나로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름은 “내 나이가 어때?”, “내 나이가 어떤데?”, “내 나이가 뭐?”처럼도 쓸 수 있어요. 그러면, “내 나이가 어때서?”를 영어로 옮길 때하고 “내 나이가 어때?”를 영어로 옮길 때하고 다르게 옮기게 될까요?
말끝 하나로, 말씨 하나로 뜻이나 느낌을 살짝 바꾸기도 하고 다르게 느끼도록 하는 우리 말 문화입니다. 그래서 “회사원 죽음”에서 조금 더 나아가 “회사원이 죽다”로 써 볼 수 있고, “죽은 영업사원”처럼 써 볼 수 있어요. “죽고 만 영업사원”이라든지 “회사원이 죽었네”나 “회사원 죽었구나”처럼 써도 어울리고요.
나라밖 책을 우리 말로 옮길 때 붙이는 책이름은 때에 따라서, 곳에 따라서, 또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진다고 봅니다. 달라질밖에 없겠지요. 예전에는, 또 앞으로 언제까지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쓸는지 모르겠으나, 앞으로도 줄곧 이 이름으로만 쓰란 법은 없다고 봅니다. 얼마든지 더 알맞을 말로, 우리 삶과 문화에 다가서는 말로 풀어낼 수 있겠지요. 제 어릴 적 영어 강사 아저씨는, 자기 생각이나 마음을 굳게 하지 말라고, 늘 말랑말랑 부드러이 움직이도록 하라고, 세월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마음을 열어 놓으라고, 책이름 하나 우리 말로 옮기는 숙제를 내주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뭐, 그분을 다시 만나서 물어 봐야 제대로 알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