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떨기 분홍색 극락조화로 피어난 시인
한 떨기 분홍색 극락조화로 피어난 시인
  • 북데일리
  • 승인 2006.12.04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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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신기섭(25)씨는 공고를 졸업했고, 쇠 공장에서 일했다. 다들 죽네 사네 하던 1997년이었다. 속절없이 고향으로 떨려나간 그는, 철 든 이래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와의 생계를 막일로 이었다. 그가 말하는 `가족`은 그리 따스한 어감의 단어가 아니었다. “사연이야 많죠… 그게, 네, 뭐, 그랬어요.”

신기섭 시인이 ‘2005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한 인터뷰다. 1년 후인 2005년 12월 4일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도시의 옥탑방처럼 외롭고 쓸쓸했던 시인은 한 마리 극락조가 되어 이 생을 너무 쉽게 탈출하였다. ‘미친 듯이 기뻐 보이는’ 눈이 내리는 날, 망루 같은 옥탑방 앞에 발자국을 새기고 싶다던 그는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눈이 소복이 쌓인 옥상에 <분홍색 흐느낌>(문학동네.2006)만 물감처럼 뿌려놓고 간 시인이 극락조화가 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빈 방, 탄불 꺼진 오스스 추운 방,/나는 여태 안산으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며칠 전 당신이 눈을 감은 아랫목에,/질 나쁜 산소호흡기처럼 엎드려 있어요/....../불현 듯 오래 전 당신이 하신 말씀; 기습아,/인제 내 없이도 너 혼자서 산다, 그 말씀,/생각이 나, 그때는 내가 할 수 없었던,/너무도 뒤늦게 새삼스레 이제야/큰 소리로 해보는 대꾸; 그럼요,/할머니, 나 혼자도 살 수 있어요,/살 수 있는데, 저 문틈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눈치 없는/눈발/몇/몇,”(‘뒤늦은 대꾸’중)

단 하나의 혈육이었던 할머니마저 잃은 시인에게 도시의 겨울은 숨쉬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외로움과 그리움의 눈발이 시인의 얼굴을 타고 눈물로 흘러내립니다.

“이 밤 마당의 양철쓰레기통에 불을 놓고/불태우는 할머니의 분홍색 외투/....../이제는 추억이 된 몸속의 흐느낌들이/검은 하늘 가득 분홍색을 죽죽 칠해나간다/값싼 외투에 깃들어 있는 석유 냄새처럼/비명의 냄새를 풍기는 흐느낌/확 질러버리려는 찰나! 나의 몸속으로/다시 돌아와 잠잠하게 잠기는 분홍색 흐느낌/분홍색 외투의 마지막 한 점 분홍이 타들어가고 있다”(‘분홍색 흐느낌’중)

겨우내 끌어안고 잤을 할머니의 외투를 꺼내 태우는 시인의 등이 물고기처럼 파닥거립니다. 그리움의 체취를 지우려는데 병꽃나무처럼 붉어진 마음이 죄스러워 마냥 눈물이 나옵니다. 시인에게 할머니를 제외한 가족의 존재는 인터뷰에서처럼 따스한 느낌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가 보는 <동물의 왕국> 속; (뱀이 뱀을 먹으며 죽어간다/....../천천히 먹어치우며 가는 몸은 멀고 먼 길이다/고독한 길 뱀은 자꾸 이빨을 박으며 간다/독은 길을 따라 몸속으로 서서히 퍼진다/....../서로 다른 끝을 보며 스쳐가듯 하나가 되는 고통 속/다시 슬그머니 눈을 뜬 뱀의 눈빛이 깊어졌다/함께 가자,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뱀은 운다”(‘아버지와 어머니’중)

서로를 먹어가면서 같이 죽어가는 뱀을 통해 평탄하지 않은 가족사를 예측하게 됩니다. ‘함께 가자’고 했던 그 다툼의 종말이 혹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들은 모두 맨바닥에 누워 있었다/저마다 간격을 두었지만 서로의 핏물이/커튼처럼 그 간격 꼼꼼히 닫아주었다/....../이제는 피로써 서로에게 스밀 수 있다는 걸/딱딱하게 굳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그들은 눈을 감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 순간/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그들도 이 생에서/눈을 뜨고 가족사진을 박는다”(‘가족사진’중)

끝내 해결하지 못한 가족의 비극은 시인을 망망대해를 떠돌고 있는 난파선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불행한 가족이 너무 많아서 등대와 같은 십자가 불빛은 불야성을 이루는가요.

“그는 또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노를 젓는다/여자의 몸이 방바닥을 휘젓는 소리/그릇들이 난파되는 소리 비명 소리 속으로/콸콸 물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다/....../그는 거친 뱃사람인 것이다 그러나/한 번도 갑판에 올라본 적 없는 선장/....../해가 저물고, 그의 배가 여자의 골짜기 끝에 정박했던 것이다/흘러간 것들을 다시 건져 올라온 그가/어딘지 모를 먼 곳으로 항해를 시작한 밤/물소리는 끝이 없고/도대체 저들은 어디까지 흘러간 것일까/귀를 막고 창문을 내다보면 너무 많은/등대의 불빛, 불빛들”(‘등대가 있는 곳’중)

골목길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나무도마는 시인이 살아온 스무 여섯 해 상처의 무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찌른 사람이나 찔린 사람이나 똑같이 상처를 입은 채 주름진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게 인생인가요.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너의 몸 그 움푹 팬 상처 때문에/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나무도마’중)

어린 나이에 환란을 맞아 쇠공장에서 일했던 시인은 그러나 강철대신 나무를 연마했나 봅니다. 아니 나무에서 피어나는 환한 꽃을 갈고 또 갈고 싶었나 봅니다.

“공장 다니는 친구 하나 연삭기에 코가 스친 순간/얼마나 깊이 다쳤나 슬쩍 코끝을 들어보았다고/코가 얼굴에서 뒤꿈치처럼 들렸다고 피가/터진 그의 얼굴이 이 저녁의 화단 안;/시름시들 숨이 멎어가는 저 붉은 極樂鳥花 같았겠다./날아오를 새의 형상이라는 꽃, 그러나 얼굴이 찢어져 있어/폭삭 주저앉은 새의 앉음새를 닮은 꽃, 느닷없이/세찬 바람에, 혹은 떼를 지어 지나가는 죽은 새들의 혼에/꽃 花자를 지우고 속박에서 벗어난 듯/오롯하게 몸을 세우고 있는 한 마리 極樂鳥,”(‘극락조화’중)

꽃에게서 꽃을 떼어냈더니 한 마리 새가 파드득 날아갑니다. 새는 그가 살았던 옥탑방 흰 눈 위에 분홍색 눈물 몇 방울 떨어뜨려 한 떨기 꽃을 다시 피웁니다. 영원히 지지 않을 불멸의 꽃이기에 이제 더 이상 흐느낄 일도 없을 것입니다. 소백산 죽령에 병꽃나무 피면 마음 붉어지고, 이화령에 사과꽃 피면 다시 늘 그리워 질 테니까요. 희고 붉어서 분홍빛 된 마음을 당신의 추모1주기에 바칩니다.

(사진=불멸을 상징하는 `극락조화`)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fargo3@naver.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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