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편지 낭독통해 심정 토로
마광수 편지 낭독통해 심정 토로
  • 북데일리
  • 승인 2006.11.3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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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마광수는 약속을 지켰다. 28일 저녁7시 홍대 근처 레스토랑(그릭조이)에서 열린 ‘편지 쓰는 작가들의 모임’ 낭독회에 그는 예정대로 참석했다. 최근 겪은 ‘고초(苦楚)’ 때문인지 그는 적게 웃고, 적게 말했다. 누구보다 일찍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그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마광수는 편지를 ‘청춘의 기록’이라 칭했다. 스스로에게 편지는 ‘일기’와도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가장 왕성하게 편지를 했던 때는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지금은 시인이 된 정호승, 김오경 등과 혈기왕성하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문학에의 열정을 다지던 그 때 학생으로서의 최고의 영광인 ‘학원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해 열심히 투고 했고 결국 그 상을 거머쥐었다. 전 처와 연애시절 나누었던 수많은 편지를 떠올렸다. 사랑의 감정은 봉투와 편지지를 화려하게 변화시켰고, 분량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책 수권의 분량에 달하는 양이 쏟아져 나왔다. 일생의 잊지 못할 편지도 그 때 나왔다. 마광수는 전 처에게 보낸 원고지 100매 짜리 편지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으로 치면 단편소설 분량 정도 될 텐데, 다시 구하고 싶긴 하지만 갖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복사라도 해두었으면 흔적이라도 남았을 텐데, 아쉽지만 지금은 사라진 시간의 흔적이다.

등단 후에는 엄청난 팬레터에 시달렸다. <즐거운 사라>로 구속되고 학교에서 쫓겨났을 때 분노심에 모두 내다 버린 분량만 한 가마니가 넘었다. 유독, 논란의 중심에 서있던 그이기에 자신을 지지해주고, 자신의 문학세계를 알아주던 독자들의 편지는 특별했다. 보답은 답장으로 했다. “지금은 이메일이 많지만 그때는 무조건 편지였으니까. 아무리 짧게라도 다 답장을 했어요. 복사를 안 하고 보냈기 때문에 남은 건 없지만” 복사도, 이메일도 익숙지 않던 그때, 마광수와 독자들은 그렇게 편지로 이야기를 나누며 우정을 쌓아갔다.

12월에 출간 될 <유혹> 이야기가 나오자 마광수는 “나만 표적으로 삼아요. 도대체 잣대를 모르겠습니다”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최근 개인 홈페이지에 음란물을 올린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은 그는 차기작마저 제 빛을 못 보게 될 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19세 미만으로 낼 까도 하지만 그러면 진열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작년에 낸 <로라>는 신문에 연재 할 때는 그렇게 경고를 하더니 책으로 내니까 아무 소리가 없었어요. 도대체 잣대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검열제도가 작가를 망친다”며 우울했던 40대를 떠올렸다. 직장을 잃고, 지면조차 잃어버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0대는 남자에게 최고의 전성기고, 제일 생각이 무르익는 시기인데 나는 싸우다 보냈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더 ‘야한’ 작가가 될 수 있었을 거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즐거운 사라>로 극심한 마음고생을 겪은 후 발표 한 소설 <불안>을 읽고 보내 온 한 독자의 편지를 낭독했다. “제일 어려울 때 받은 편지라 더욱 기억에 남아요. 주소도 남아있지 않은 편지라 답장을 드리지도 못했어요. 그 마음이 감사해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광수는 이 편지를 월간 ‘에세이’에 실었고 그래서 그 내용이 남게 됐다.

그는 낭독 중 ‘우리사회의 몰개성’ ‘획일주의 사회’라는 부분에서 음성을 통해 의미심장한 방점을 찍었다. 지금 입장을 말로 해명하는 것 보다 편지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듯 보였다. 이날 낭독한 마광수의 편지를 싣는다. 2006년 11월 15일 한국일보에 공개한 편지의 ‘원본’이다.

“아파트 수위실에 맡기고 간 케이크와 편지 잘 받았습니다. 그동안 독자 편지를 많이 받아 본 편입니다만 직접 제 집으로 찾아와 선물과 함께 놓고 간 편지를 받아보긴 처음입니다. 선물을 받아서라기보다는 편지의 내용이 너무나 감동적이었고 또 제 문학세계와 실제 성격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계신 것 같아 무척이나 흐뭇했습니다. 이름만 써놓으셔서 더 아련한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지요. 당신은 분명 상상력과 미적 감수성이 뛰어난 여성인 것 같습니다. 제가 낸 장편소설 <불안>을 잘 소화해서 재미있게 읽어 주셨으니까요. 한국에는 이상하게도 유미주의의 전통이 없습니다. 불안은 탐미주의의 입장에서 묘사적 리얼리즘의 회복을 목표로 시도해 본 일종의 실험소설인데 제가 늘 소재로 삼아온 페티시즘(Fetishism)의 미학을 좀 더 집요하게 천착해본 작품이지요.

영상 적 판타지를 겨냥하기 위해 뚜렷한 스토리나 대사 없이 여성의 외향과 복장 그리고 성적행위만을 사진 찍 듯 묘사해 간 소설이라서 대다수의 독자들의 반응은 읽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당신께서는 <불안>에 나오는 몽환적인 사랑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고 또 문학적으로도 성숙한 작품으로 느꼈다고 했습니다. 작가로서는 자기의 문학세계를 알아주는 독자가 단 한명이라도 있을 때 뿌듯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나 저처럼 끊임없는 구설과 매도, 필화(筆禍)에 시달려 온 작가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당신께서는 또 제 얼굴이 늘 착하고 천진스러운 소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벌써 늙어버린 제 나이에 비해 볼 때 너무나 과분한 칭찬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당신의 격려로 크게 용기를 얻게 된 게 사실입니다. 저도 이젠 정말 연애다운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찬 예감을 느끼기까지 했으니까요. 당신도 우리 사회가 몰개성이 정상으로 취급되는 사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개성이 ‘모난 돌’로 치부 되어 ‘정’을 맞을 수밖에 없는 사회. 그런 획일주의 사회가 바로 우리 한국입니다. 당신이 쓰셨듯 우리사회가 좀 더 열린사회 정신적으로 세련된 사회가 되어 자기와 개성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너그럽게 수용하고 살아가는 사회가 되기를 저도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1997년 새해를 맞이하고 나서 저는 한동안 우울했습니다. 우선은 교육계에서나 문학계에서나 외롭게 소외되어 있는 저의 처지가 안쓰럽게 느껴져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주변의 압력 때문에 자꾸만 제한되어 가는 저의 관능적 상상력과 그 결과 상상을 실제적 사랑으로 실천하는 면에 있어 전혀 능동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저의 현재 상태가 짜증났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벌써 다 큰 자식들을 두고 있고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정된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이때 나는 아직도 철부지 어린애 같은 방황을 해야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내가 사랑에 있어서나 문학에 있어서나 영영 아웃사이더나 소외자로 머물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나아가서는 촌스럽게 제 노후까지 걱정하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당신의 편지를 읽고 나서 저는 다시금 아이덴티티를 재확인 한 동시에 사랑과 창작에 대해 새로운 열정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새해 부디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로 겉과 속이 다 야한 여성이기를 기대해봅니다“

[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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