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일제군병 `아름다운 고백`
김수환 추기경 일제군병 `아름다운 고백`
  • 북데일리
  • 승인 2005.08.24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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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0년, 해방된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친일문제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에 부역하거나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가 면면히 살아남아 사회 지도층으로 행색하며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최근 한 일간지에서 우리시대 존경받는 인물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종교인 부문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1위로 꼽혔다.

그는 ‘교회는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한국 근, 현대사의 인권과 사회 운동에 앞장서왔다.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서울 명동성당이 핍박받는 이들의 해방구가 된 연유도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해 말 발간된 자전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평화신문)에는 일제 치하에서 그가 군병생활을 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일본 상지대에서 유학(1941~1943)하던 당시, 일본의 강요에 시달려온 대구교구장이 ‘학병에 지원하라’고 보낸 전보를 받았다. ‘주교에 순명하라’는 교리 법을 거역할 수 없었던 그는 “학병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록을 통해 고백했다.

또 김수환 추기경의 발자취와 강론을 담은 홈페이지(cardinal.catholic.or.kr)에서 그는 일제강점기 말 학병으로 1년 여 복무하면서 군복을 입고 찍은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공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김 추기경의 자기고백은 광복 60년을 맞아 사회 통합과 화합이라는 큰 테두리에서 참회를 통해 용서를 구하는 사회지도층 인사의 자기고백으로 다가온다. 일제에 부역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용서를 구하거나 부역한 사실을 스스로 공개한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끊임없는 반성과 고백이 더욱 빛나고 있다.

그는 복무를 하면서 주둔지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쪽지를 사물함에 꽂아두고 동료학병과 함께 미군이 점령한 곳으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이 무시된 채 단순히 일본 학병으로 1년여 동안 복무한 사실이 세상에 회자되어 김 추기경을 ‘친일파’로 몰아세워 그가 곤란을 겪은 적이 있었다.

김 추기경은 일제의 강제 징집에 대해 “수많은 무고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명분도 없이 억울하게 싸우다 죽어가게 했던 치욕의 역사를 잊을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없는 사람들을 위해 다가가는 교회, 이웃의 아픔을 보듬을 줄 아는 교회를 만들어 온 김수환 추기경은 성직자로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2년 반 동안의 본당 신부시절”이라고 밝혔다.

또 회고록에서 김 추기경은 마더 데레사 수녀를 “가난, 불평등, 전쟁 등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문제의 궁극적 해답을 갖고 계셨던 분”이라며 칭송했고, “마더 테레사 수녀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했다는 게 제일 후회스럽다”며 “말로만 가난한 사람을 걱정했지 사실 그들과 더불어 나눈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부끄러워했다.

우리 사회에 수구세력의 뿌리가 만연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서 비롯된다.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이 제 구실을 못하는 이유도 수구세력의 견제함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김 추기경의 아름다운 고백이 깊은 반성과 고해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일제에 부역했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지난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이 권력 속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진 = 일제 시대 군복무를 했던 추기경이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며 사진을 공개했다.) [북데일리 백민호 기자] mino100@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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