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박범신에게 1년 `감금`당해 데뷔작 썼다"
이기호 "박범신에게 1년 `감금`당해 데뷔작 썼다"
  • 북데일리
  • 승인 2006.11.10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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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펴낸 이기호

2000년, 추계예대 문창과 조교였던 소설가 이기호(34)의 레이더망에 한 여학생이 포착됐다. 수강신청이 잘못됐다는 핑계로 호출하고, 근로 아르바이트 명단에 무조건 1순위로 올려주며 ‘작업’하길 1년. 8살이 어린, 순진무구한 후배는 결국 ‘마수’에 걸려들었다.

이기호의 두 번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문학동네. 2006)는 10월 21일, 정식으로 ‘코가 꿴’ 여자친구(작가는 아직도 부인을 여자친구라 칭한다)에게 바치는 결혼선물이다. 연애기간 5년, 결혼 전의 동거, 잦은 이사. 배고팠고, 힘들었고, 가난했다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촉촉이 젖어든다. 눈가가 아련하다.

신혼 아닌 신혼부부의 집에선 고소한 참기름 냄새대신 진한 ‘살내음’이 풍겼다. 지지고 볶고 웃고 울고, 그렇게 부대끼며 사는 보통 사람들의 체취였다.

단구동 ‘무지개파’, 룸살롱 ‘토지’ 모두 실제 해...

사람 사는 냄새는 소설에서도 여전하다. ‘작정’하고 자기 이야기를 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단구동을 주름잡던 거대 폭력조직 ‘무지개파’, 씨름기술(들배지기, 오금당기기)을 폭행에 접목시킨 씨름부원 등 소설(‘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실존인물. 학창시절을 통틀어 9번의 집단구타를 당했다. 문제아였던 형 때문도, 자주 어울리던 양아치 친구들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다.

당시엔 끔찍했던 정신적 내상들은 글로 풀어내면서 치유됐다. 소설이 이기호에게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원주통신’에 등장하는 룸살롱 ‘토지’도 실제로 강원도 원주에 있었다. 그것도 박경리 집 코앞에. 사실 그 땐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9살 꼬마가 대작가를 알리 만무. 이기호에게 박경리는 자신의 놀이터이자 친구의 집을 차지한, 이방인이었을 뿐이었다. 원망스러운 마음에 매일 벨만 누르고 도망갔단다.

자전적 색채가 강하다 해도 소설이기에, 분명 허구도 있다. 국기게양대를 사랑하는 남자(‘국기게양대 로망스’), 흙이 주식(主食)인 남자(‘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등 독특한 캐릭터는 상상력이 빚은 산물. 잠에서 깨었을 때 불현듯 이기호를 찾아온 이도 있고, 몸을 혹사시킨 결과 겨우 얻어낸 이도 있다.

“잠을 안자면 (사람이) 혼미해지잖아요. 그 때 뭐가 생각나거든요. 하룻밤 샜는데 안 나온다. 그러면 생각하죠. 음 하루 더새야겠군.”

이기호는 쓰러지기 일보직전까지 소설에 몸을 내줘야, 글과 캐릭터가 나온다고 믿는다. 이게 다 스승 탓(?)이다. 명지대 대학원에서 만난 작가 박범신은, 등단 준비 중인 그를 용인 작업실에 가두었다. TV도, 라디오도, 주변에 인가도 없는 곳에서 소설 쓰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1999년 월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당선된, 데뷔작 ‘버니’는 1년간의 감금생활 끝에 얻은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정작 글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은 3일, 작가는 "오랜 고민이 한 번에 토해져 나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고통은 나의 힘”

이기호의 글쓰기 인생에는 늘 미약하나마 고통이 어려 있었다. 11살 때, 어머니가 외판원에게 속아서 산 ‘한국문학전집’을 100번 넘게 읽었다. 그 때 붙은 감수성은, 포르노비디오와 만화책을 탐닉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고3때 사귄 여자 친구에겐 6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2통씩 보냈다. 여자 친구는 답장을 쓰다가 성적이 떨어졌고, 그의 문장력은 ‘급상승’했다.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집단 구타를 당한 후 병원에 입원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후에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밀려왔다. 그래서 문예창작과(추계예술대)를 지원했다. 대관령 고지에서 보낸 군복무 시절엔 야간 근무를 매번 자원했다. 혼자서 밤을 새며, 사회에선 읽지 못했던 딱딱한 철학서들을 누런 갱지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대략 30편정도. 상사에게 맞으면서도 책을 읽었다. 그리고 1년여의 감금생활 후 등단.

등단 후에도 한동안 1년에 들어오는 원고 청탁이 1,2건이었고, 한 달 생활비는 50만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훌륭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다. 읽고 싶은 책을 1주일에 한 권은 살 수 있었고, 한 편의 영화는 볼 수 있었다. 점심을 라면으로 때우고 서울 시내를 걸어서 돌아다녔지만 “삶의 질이 내 월급의 열배, 백배를 받는 친구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이기호는 여전히 버는 만큼 쓰는데 익숙해져 있다. 여자 친구는 도리어 한수 위. 같이 살아도 되겠구나, 마음먹었던 결정적 계기이기도 하다. 소설을 쉽게 그만둘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면 계속 배를 곯아야 하지 않겠는가. 매사에 크게 욕심 부리지 않는 여자 친구에게 고마울 따름이라 말하는 그의 육성이 또 다시 물기를 머금는다.

작가는 오늘도 자신을 ‘혹사’시키며 글을 짜낸다. 밥을 안 먹고 잠을 안자고 담배만 피워대면서. 여자 친구 속은 타들어가고, 그의 몸도 곯아가지만 어쩌겠는가. 소설은 고통의 산물인 것을.

“작가는 갇혀야 되고, 손발이 다 짤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야 하고... 너무 너무 외롭고 쓸쓸해져야, 그래야 글이 나와요.”

[북데일리 고아라 기자] rsum@naver.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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