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병주에 미쳐 25년간 200권 수집
작가 이병주에 미쳐 25년간 200권 수집
  • 북데일리
  • 승인 2006.10.31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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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광의 방] 안양사는 오흥근씨

헌 책 한 권을 구하기 위해 천릿길도 ‘기꺼이’ 달려가는 사람, 술집은 몰라도 헌책방 위치는 아는 사람, 밥은 걸러도 책은 사는 사람. 이들이 바로 독서광이다. 책을 향한 저돌성, 수집에의 본능, 보관에의 완벽증 때문에 그들의 피는 늘 뜨겁다.

취미라고는 ‘독서’ 밖에 없는 이들에게 책읽기와 책수집은 유일한 놀잇감이자, 희열의 대상이다. 여기에 다른 분야의 수집이 더해질 경우, 게다가 그것이 신문 스크랩일 경우 상황은 심각해진다. 기인에 가까운 솜씨로 수집과 정리, 보관을 일삼는 이들은 모든 것을 조용히 해치우지만 그 안에 끓고 있는 열정의 온도는 가히 추측이 불가능하다.

경악을 금치 못할 수집광이자 이병주(1921~1992) 작가의 마니아인 독서광 오흥근(46, 경기도 안양시 호계동)씨는 주머니에 늘 칼을 갖고 다닌다.

필요한 자료를 발견하면 언제든 오리기 위해서다. 수십 장의 신문 겹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단칼에 잘라내는 놀라운 솜씨는 무려, 30년간 갈고 닦아온 것. 각종 문예지, 잡지의 초판본, 작가별, 판형별로 수집해온 책, 수십 권의 스크랩북이 놓인 그의 서재는 황홀하고, 정갈했다. 청년 시절, 기자가 되고 싶었다는 오 씨는 2천5백 권의 책의 역사를 이야기 하며 눈시울을 적셨고, 이병주 작가를 떠올리며 가슴을 떨었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 오 씨의 서재에 먼지처럼 수북히 쌓인 ‘기막힌’ 사연들을 공개한다.

“전국 헌책방 뒤져, 이병주 책만 200권 수집”

오 씨의 수집 병은 대학시절 이병주의 <지리산 ,전7권>(한길사. 2006)을 만나고부터 시작되었다. 마흔넷에 등단해 한 달 평균 2백자 원고지 1천장 분량을 쓸 정도로 다작(多作)했던 작가 이병주. 1992년 총 10만 여장의 원고에 단행본 80여권의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이병주는 오 씨에게 특별한 존재다.

그가 남긴 저작이 80권인데 오 씨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200권이 넘는다는 사실은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든다. 이유는, 출판사가 바뀌거나 판형이 변하면 그 때마다 다시 구입했기 때문이다. <바람과 구름과 비>(한길사. 2006)는 무려 7종류, <산하>(한길사. 2006)는 4종류나 갖고 있으니 ‘무서운’ 수집력이 아닐 수 없다. 오 씨는 이병주를 만난 처음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언론을 통해 이병주 선생님의 <지리산>을 처음 접했습니다. 관심을 두고 있던 차에 교보문고에 들르게 됐고 7권을 그 자리에서 샀어요. 저는 불운한 시대를 겪은 79학번입니다. 휴교령이 빈번하게 일었고 그때마다 학업공백기간을 책을 읽으며 보냈어요. <지리산>도 그때 읽은 책입니다. 시대에 처한 한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내용이 무척 와 닿았어요. 우리 같은 젊은이들이 분단으로 대치된 이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하는가 라는 진지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지요”

<지리산>을 읽고 나서 집요하게 달라붙어 볼 만한 작가라는 결론을 내린 오 씨는 그 때부터 전국의 책방을 뒤져 이병주의 초판본을 수집했다. 오 씨는 문학, 철학, 역사 전 분야를 아우르며 80권의 저작을 남긴 이병주 같은 작가는 흔치 않다며 왕성한 필력을 높이 평가했다. 무엇보다, 격변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작가라는 점에서 그의 가치는 더욱 남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병주는 5.16 정변, 필화 사건 등으로 말미암은 숱한 감옥살이를 겪은 환란의 작가다.

“당시 이병주 선생님이 쓰신 논설에서 ‘산하는 있지만 조국은 없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 해집니다”

작품을 통해 끝까지 ‘중용’의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더욱 이병주를 존경한다는 오 씨는 철학적, 사상적 이야기를 저급하지 않게 풀어 낸 점, 뛰어난 현학적 레토릭, 수위를 넘지 않는 알맞은 연애관과 묘사 등을 이병주 문학의 ‘마력’으로 꼽으며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복어사전>(한길사. 2006)을 빼놓지 않고 읽어야 한다고 추천했다. 가장 ‘이병주다운’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시기 영세중립국화 발언,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 최종 검토, 끊임없는 이적성 시비 등 이병주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객관적 태도를 보였다.

“작품에서 추구했던 이상향과 다르게 끝까지 일관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것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점이에요. 작품을 좋아하지만 이병주 선생님을 맹목적으로 우상화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가 이룬 문학적 성취가 업그레이드 돼야 하고 재평가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여성편력적인 표현, 정치적 논란으로 인해 한국문학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좁아졌고 문학 작품마저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죠”

오 씨는 현재, 이병주 문학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색인 작업에 심취해 있다. 유달리, 철학가, 음악가, 사상가들이 많이 등장하기에 이를 정리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말, 못 말리는 취미다. 이렇듯 수집과 기록에 미쳐있는 그가 비철, 전선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고 이후 현재 일하고 있는 분야에서 열심히 뛰어온 결과 직원은 5명밖에 되지 않지만 연 매출 20억을 달성하는 내실 있는 회사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남다른 책 욕심에 사로 잡혀 있는 독서광 오 씨는 책을 모을 수 있었던 배경을 ‘경제력’과 ‘열정’에서 찾았다.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직업이 출판기자, 출판평론가에요. 돈을 내지 않고도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잖아요. 전집 같은 경우 10만원이 넘어가는데 부담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죠. 솔직히 경제력이 수집과정에 일조 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에요. 여러 작가를 좋아하는 열정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요인이고요”

오 씨는 솔직하게 경제력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취미를 영위하는 삶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그는 책읽기를 통해 인내심과 중용의 생각을 기를 수 있었다고 했다.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그의 유일한 취미는 책읽기와 수집뿐. ‘외로운 천재’(외천) ‘21세기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불리 우는 그에게 서재는 청춘의 열망이 그대로 녹아있는 영원한 꿈터다.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사진 = 고아라 기자)

[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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