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가 실재를 대체, 지배하는 시대성 고찰
[화이트페이퍼=임채연 기자] 광고가 그려내는 빛나는 상품, SNS 이미지로 만드는 정체성, 이모티콘으로 표현하는 감정처럼 대중매체 이미지가 일상을 주도하는 시대다.
정소연 작가는 지난 30년간 ‘가상’과 ‘실재’라는 키워드 아래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2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 ‘The Pink Moment’전은 대중매체와 SNS 등의 매혹적인 ‘핑크빛’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핑크빛 순간’으로 성찰하고 있다. 텍스트보다 이모티콘이 익숙한 소통의 시대에 가상의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현상에 초점을 두고 있다. 다양한 시각 이미지가 도처에 편재하며 그것이 대중의 사회적 인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의 초기작에서는 여성, 결혼, 성과 같이 한 여성의 개인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사회를 설명하는 주요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작업들이다. 결혼 문화를 대변하는 화려한 드레스, 안주로 나오는 반짝이는 디저트, 성기를 연상시키는 눈 등으로 여성을 향한 (무)의식적인 기준과 편견을 짚어냈다. 대중매체의 이미지가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미지가 기준이 되어 또 다른 여성에 대한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도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 작가는 각 여성의 실제적인 일상보다는 대중매체에서 반복적으로 노출시켜 여성의 삶을 고정시키는 이미지와 그를 강화시키는 무형의 모든 맥락을 ‘핑크빛’으로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2010년경부터 회화 매체를 통해 자전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여성이라는 주제에서 가상과 그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현상 자체를 조망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예컨대 특정 아이콘이 추상적인 감정과 정체성, 기념일 등을 표현하고 식물도감 속 아름다운 식물의 모습이 실제의 식물을 대신하는 것처럼, 이미지를 통해 역으로 본래의 대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작가는 실재를 대신하는 이미지를 개별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화폭에 모아 재배열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 ‘핑크빛’ 풍경들은 인간의 이상향에 대한 욕망을 투영하는 듯 보인다. 다시 말해, 이 풍경은 실재보다 매혹적인 이미지의 집합체로, 이를 꿈꾸고 살아가는 지금의 갈망과 겹쳐진다.
작품 ‘언캐니 가든’은 바닥에 배치된 조화와 여러 영상을 공간 곳곳에 투사하여 실재인 듯 보이지만 가상의 공간을 구현한 설치 작업이다. 벽에 투영된 영상은 하루에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하늘의 변화를 압축하여 보여주고, 꽃이 자라기 위해 필요한 물을 벽과 모서리에 거꾸로 흐르게 비춰준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재제작된 본 작업은 이전과 달리 생화가 아닌 조화로 구성되어 그 어떤 것도 자연의 일부는 없는 가상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실재와 가상을 오가는 이 생경한 풍경은 현시대 개인이 꿈꾸는 핑크빛 이상향이 정말로 본인이 원하는 것인지 혹은 사회가 만들어내는 그것을 바라는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작품 ‘아날로그 복제에 의한 이미지 변조-호흡’은 아날로그 기술의 언어로 분해되고 희미해지는 이미지를 탐구한다. 작가는 흐릿해지는 할머니의 모습에 아날로그 테이프의 낡아가는 물질성을 병치한다.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형상을 깜박이는 픽셀과 줄무늬로 변하게 만든다. 비디오와 함께 설치된 스틸 컷은 이미지가 점차 거칠어지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화려한 색감을 담고 있다.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대중매체에 의해 전해지는 실체 없는 여성의 삶 전반을 시사한다.
작품 ‘네버랜드’연작은 식물도감의 이미지를 화면에 재구성한 작품이다. 작가는 실제 식물보다 아름다움이 극대화되어있는 이미지를 오히려 실재로 여기고 있음에 주목하여 도감 속 식물 이미지를 모아 가상의 숲을 만든다. 한 화면에 있는 식물들은 사실 각기 다른 기후와 토양에서 서식하기에 공존할 수 없지만 이러한 점은 구분되지 않은 채 빼곡하게 차 있다. 이는 꿈과 현실이 해체된 또 다른 현실로 기호가 실재를 대체하는 경험을 말한다. ‘포스트 네버랜드’연작은 ‘네버랜드’연작의 이미지를 변형하여 평면성과 공간감을 모두 감각할 수 있도록 시도한다. 이러한 일루전(illusion)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하나의 이미지에 균열을 내며 새로운 장소를 마주하게 한다.
성곡미술관 남은혜 학예연구사는 “지난 30년의 정소연 작업에서 드러나는 '핑크빛 순간'은 실재가 아닌 허상이지만, 마치 진짜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 빛나는 순간은 실재에서 이미지가 파생되고 또 파생된 이미지로 인해 새로운 실재가 창조되는, 실재와 이미지가 엮여있는 현재의 모습을 토대로 한다”고 말했다.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닫는 정황이다.
정소연 작가는 이화여자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뉴욕 공과 대학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 아트 전공 석사,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예술공학전공 영상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6년 첫 개인전 이후 약 30년 동안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초기 비디오 설치부터 회화, 사진,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사회문화적 현상을 탐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