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 여자들이여, 팔자는 낡고 오래된 유혹일 뿐!
[자기계발] 여자들이여, 팔자는 낡고 오래된 유혹일 뿐!
  • 아이엠리치
  • 승인 2006.05.30 10: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쎄… 고달픈 10대 시절에는 대학만 들어가면 꽃처럼 예뻐지고, 나무처럼 싱그러워지고, 숲처럼 넉넉한 남자 만나 아름다운 연애도 짓고 하면서 살 줄 알았죠. 그런데 웬걸, 취업 걱정에 도서관에서 청춘 다 보내고, 겨우겨우 직장 잡아 한숨 돌릴 만하니까 노처녀가 되더군요. 부랴부랴 면사포 쓰고 시집에 들어가니, 휴… 산 넘어 백두산, 물 건너 태평양이지 뭡니까….”

 

그래도 희주씨는 ‘열정’으로 20대 청년의 강을 건넜다. 아름답게 달뜬 꿈을 통과하며 공부도 일도 언제나 뜨거웠다. 때로는 밤잠을 뒤척이며 자신의 마음을 열고 들어온 눈부신 청년에게 애틋한 연서戀書를 적기도 했다. 그녀의 스무 살 시절은 자신과 삶과 세상과의 연애로 가득했다. 그 ‘연애’ 때문에 그녀는 그 시절을 통과하고 기꺼이 견딜 수 있었다.   


그녀는 아홉수를 피해 서른이 되던 해에 결혼했다. 신혼의 단란한 꿈 밑에서 아이를 가졌고, 남편과의 상의 끝에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았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편 덕분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회사 동료들도 제가 퇴직의 뜻을 밝히자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더군요. 마지막으로 저녁밥을 먹는 자리에서, 그들은 묵묵하게 말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희주씨처럼 떠나가겠지….’ 고기를 굽는 매캐한 연기가 그을음처럼 천장으로 올라가고, 제게 던진 그들의 말은 결국 그들 자신을 향한 고백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몇 년 직장을 다녀 시집 갈 밑천을 장만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쩌면 우리의 서른은 다른 사람의 세계에 정신없이 바쳐지고 또 그래서 정신없이 쓸쓸해지는, 가을날 점점 옷을 벗는 나무와도 같지 않나, 하는 생각에 잠겨 고요히 주고받는 술잔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목이 콱 메더군요.” 

 

어쩌면 그녀의 서른은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여정이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쩌면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무거운 ‘운명’과의 조우였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어머니, 딸들이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 ‘여자’의 길 말이다. 

 

“두 살 터울의 남매를 키우다 보니 정말 외롭고 높고 쓸쓸하더군요. 대체 내가 왜 그토록 아등바등 대학을 들어갔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처럼 도도하고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청춘을 통과해 온 사람이 맞나 싶어 맥없이 눈물이 나더군요.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 건가…. 정말 여자 나이 서른이란, 잔치가 끝난 쓸쓸한 마당인가’ 하는 생각에 잠겨 한동안 정말 우울했어요. 남편은 바깥에서 점점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고, 아이들도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지만 문득 그 안에 제 모습은 없었어요. 존재 그 자체는 젖혀두고서라도,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건 정말이지 견디기가 힘들더군요.”  

 

그녀는 맏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마침내 운명의 사슬을 끊어내는 결단을 내렸다. 입주 도우미를 들이고 대학원 진학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애들 다 키워놨으니 이제 좀 쉬지, 뭐가 아쉬워서 또 공부냐?’ ‘아이들이 학교에나 들어가고 난 다음에 뭘 해도 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남편의 성공이 제 삶을 보상해 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체 왜 여자들은 대리만족에 만족해야만 하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제 나이가 마흔입니다. 30대라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절을 건너뛴 채 20대에서 40대로 곧장 넘어간다는 건 말도 안 되죠. 10년의 공백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마흔에는 마흔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서른에는 서른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는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더욱 자랑스럽고 행복한 엄마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제 어린 딸에게 끊임없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엄마가 아니라 자신을 계발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당당한 한 사람의 모습으로 비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과 헌신으로 유지되는 가정은 건강하지 못하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하는 가정에서 비로소 참된 삶과 인간다움의 진정성이 피어난다. ‘가족’이라는 큰 틀을 위해 그 구성원들의 희생이 요구된다면, 이는 전체주의 국가의 파시즘과 다를 게 없다. 따라서 가족을 위한 희생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여자의 서른은 당당하고 존중받는 한 개인의 소중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

 

“희망은 결코 유보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한번 미뤄둔 희망은 절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저는 서른을 통과하며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30대에 큰 수확을 거둔 셈이죠.”

 

희주씨의 서른은 행복하고 당당하다. 그녀의 일상생활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남편의 셔츠를 다리고, 아이들의 간식을 꼼꼼하게 챙긴다. 하지만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배려’다.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다. 희주씨 또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 속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좀더 크고 깊은 삶의 꿈들을 하나하나 이루어나가고 있다. 

 

교단에 서서 스무 살 꽃 피는 대학생들을 보면 어쩜 저렇게 예쁠까,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온다. 꾸미지 않았음이 꾸민 것보다 아름다운 시절을 싱그럽게 건너고 있는 그들을 보면 공연히 마음 설레고 얼굴이 붉어진다. 그들 또한 희주씨처럼 당당하고 굽힘없이 서른의 강을 건너리라.  

 

 “스무 살 시절에는 세상 모든 달콤한 유혹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아요. 남들보다 많이 넘어져본 사람이 남들보다 빨리 일어설 수 있죠. 하지만 서른에는 결코 유혹이 주는 달콤함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의 여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이 바로 ‘운명’이 가져다주는 체념입니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자신에게 속삭이는 그 순간, 모든 게 사라집니다. 운명과 팔자는 그 굴레를 벗어버리고 나면 아주 간단한, 그저 낡고 오래된 유혹일 뿐입니다.” 

 

[김현정 커리어디시즌 대표], 참조<서른살 여자가 스무살 여자에게> (토네이도,2006)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