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끝! 이젠 야만인을 기다려야 해
토끼 끝! 이젠 야만인을 기다려야 해
  • 북데일리
  • 승인 2006.03.10 11: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름시름 앓는 나를 보고/문정희 시인이/신 선생 약은 딱 하나/산 도적 같은 놈이/확 덮쳐 안아주는 일이라고 한다/....../기린 목의 하얀 사내들 속에/산 도적이 남아 있는지 몰라/....../그래도 어딘가 산 도적이 숨어 있을까/....../주저 앉으려는 내 몸을 번쩍 들고/....../우직하고 강직한 진실 하나는/피보다 붉은 몸도 마음도/힘이 쎈 산 도적 어디 있을지 몰라”

신달자 시인의 ‘산 도적을 찾아서’이다.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들녘.2003)는 또 다른 산도적인 ‘야만인’을 기다리는 문명인을 그린 소설이다.

변방에 자리 잡은 어느 도시의 치안판사인 주인공 ‘나’는 야만인 사냥을 떠난 텅 빈 도시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공간은 공간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그건 어디를 가나 똑같다. 다른 사람들의 고생으로 편하게 먹고사는 나에게는 여가시간을 때우기 위한 문명화된 악습도 없다. 그래서 나는 우울함에 맘껏 젖어 텅 빈 사막에서 특별한 역사적 비애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헛되고 맥없고 잘못된 짓이다! 나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야만인 사냥에 무력감을 느끼던 나에게 어느 날 야만인 여자가 붙잡혀 온다. 고문으로 시력을 잃은 여자의 상처를 감싸 안으려 하지만 나의 힘은 미약하기만 하다.

“그녀가 내 가슴을 코로 비빈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따뜻하고 친절하게 받아줄 것 같다. 그러나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너와 내가 잠을 자고 있는 밤사이에 끔찍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자칼은 토끼의 내장을 찢어발기지만, 세상은 계속 굴러간다.”

그러나 굴러가는 돌 아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가시덤불 속의 새를 꺼내 ‘야만의 땅’으로 다시 돌려보내 주는 일이다.

“어느 새가 가시덤불 속에서 노래를 하고 싶겠는가?” 이 아름다운 여자들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몸을 소유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인가? 욕망은 거리감과 분리감이 주는 비애를 동반하는 것 같았다.”

고된 여행 끝에 여자를 야만인에게 바래다 준 나는 ‘진짜’ 야만의 도시를 떠난다.

“이것은 내가 꿈에서 보았던 광경이 아니다. 요즘 들어서 다른 많은 경우에 그러한 것처럼, 오래 전에 길을 잃었지만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할 길을 따라 계속 걸음을 옮기는 사람처럼, 나는 바보 같은 느낌을 받으며 그곳을 떠난다.”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의 네덜란드계 백인 가정에서 태어난 존 쿳시는 이 소설에서 제국의 문화와 야만인의 문화가 교차하는 익명의 변경을 주된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것은 폭력과 억압의 사슬이 보편적이라는 그의 인식 때문이다.

“어째서 모든 거리와 광장이 그렇게도 빨리 텅 비어지는가?/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도 깊은 생각에 잠겨 다시 집으로 향하는가?/저녁이 되었어도 야만인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일부 사람들이 변경에서 돌아왔다/그들은 더 이상 야만인들이 없다고 말했다/야만인들이 없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그 사람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다”(콘스탄틴 카바피의 詩 ‘야만인을 기다리며’)

야만인을 찾지 못한 문명인들이 사막을 헤매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와, 거대한 항공모함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 중 던진 한 마디.

"토끼 끝이야! 니들이 야만인이야!!"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http://blog.naver.com/fargo3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