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시인의 아련한 통증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시인의 아련한 통증
  • 북데일리
  • 승인 2006.02.1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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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랑은 격렬한 상실 안에서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것은 사랑의 원천이 상실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태어나기,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를 상실하는 것이다.”(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중에서)

그러므로 생은 상실된 흔적을 찾아가는 고통스런 여정이다. 상실의 아픔으로 인해 늘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 2001)을 안고 사는 장석남 시인을 만나보자.

“사랑은,/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배가 들어와/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배를 매게 되는 것//잔잔한 바닷물 위에/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떠 있는 배//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온종일을 떠 있다”(‘배를 매며’)

사랑은 강물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어처럼 으뭉스럽고 느닷없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물빛처럼 일렁이며 서로에게 스미는 것이다.

“배를 민다/배를 밀어보는 것도 아주 드문 경험/......//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배를 한껏 밀어내듯이 슬픔도/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잠시 머물다 가라앉고//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배를 밀며’)

또한 사랑은 결별과도 서로 묶여있다. 마사초가 그린 최초의 인간의 발이 암흑과 에덴동산 문턱에 걸쳐있듯 우리는 사랑과 결별, 삶과 죽음, 언어와 침묵 사이의 경계에 있는 것이다.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잘못 꾼 꿈이 있었나?//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殘像들/지나가는 바람이 잠시/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그런 길이었긴 하여도//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죽음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려 할수록 가슴은 사이다처럼 싸하게 통증이 밀려온다. 바람만이 휑한 꽃이 사라진 마당에 팔짱을 낀 채 남몰래 상실의 가슴을 매만지는 사람.

“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없다/빈 마당을 볼 때마다 너는 없고/너는 훌쩍 없고/없고 그러나/내 곁에는 언제나 훌쩍 없는/사람이/팔짱을 끼고 있다/-빈 마당을 볼 때마다 나는 하나뿐인 심장을 만진다”(‘빈 마당을 볼 때마다’)

그러다 마당에 열린 감을 보면서, 사랑의 열매인 감의 살이 흘러내려 어디론가 ‘감’을 어두운 씨앗처럼 쓸쓸하게 바라봅니다.

“파르스름한 접시에 연시를 한 세 개만 담아 오세요/창 밖에 눈이 오도록만 바라보고 앉았다가/감 속에 까맣게 서 있는 씨앗들 보이도록만 앉았다가/일어서겠어요/감을 주세요/연애는 그토록 슬픈 거니까/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듯 슬픈 거니까”(‘감’)

허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상실의 고통을 달랠 수 없습니다. 생은 때로 대낮의 환한 유곽처럼 낯설고 어리둥절하여, 취한 듯 상심의 염통을 오동꽃으로 올려놓고 서성이게 합니다.

“발치에 다가오는 그림자 한 자락/평상 뒤에 오동나무 한 주 서 있다/누군가 맡긴 수많은 심장들을 펄럭이며 서서/내 심장을 보여달란다/벌써 무릎까지 올라온 심장 그림자 한 자락//낯설고 눈부신 노래를 눈으로 불러/심장을 주고 일어서니//내내 내 一生은 그/유곽 앞에 서 있던 오동나무처럼/가련히 아무데서고 서 있는 거였다.”(‘유곽 앞에 서 있던 오동나무처럼’)

유곽 앞 텅 빈 뜰에서 오동나무처럼 서 있는 시인의 가슴에 팥배나무 하얀 꽃이 눈처럼 쌓입니다. 상실의 아픔에 출렁이던 시인의 왼쪽 가슴이 환하게 보이고, 가슴에서 영혼으로 이르는 길 하나 오롯이 열립니다. 오동나무의 보랏빛 통증으로 아파하고 싶은 생......

(사진 = 스튜어트 G. 타운즈 작품)[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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