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체 수사본부? `옛날신문 이색풍경`
나체 수사본부? `옛날신문 이색풍경`
  • 북데일리
  • 승인 2006.01.1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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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15일 하룻동안 3건의 스트리킹이 발생, 사회의 새 두통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이날 하오 6시 반쯤 경남 충무시 부전동 209 전명길씨(27.구두닦이)가 번화가인 서호동 충무극장 앞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시가지를 900m 뛰어 통영여고 운동장에 뛰어들었다. 때마침 수업을 끝내고 운동장에 나섰던 300여 명의 여학생들은 전씨의 나체 출현에 놀라…….(중략) 하오 1시 20분쯤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한남펌프장 앞 대로에서 22세 가량의 한국인 장발 청년 1명이 알몸으로 신을 벗은 채 400m 가량을 질주.(후략) - 1974.3.16"

지금은 신문 가십기사에 불과한 그 사건 때문에 정부가 나체질주자 수사본부(裸體疾走者 搜査本部)란 이색간판을 내걸고 1주일간 100여명 수사관을 동원했다는 기사 한 토막이다. 당시 도덕적 엄숙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고되고 힘들었던 일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는 법이다. 보릿고개와 흑백TV로 상징되는 시절을 엿보고 싶다면 이승호의 <옛날 신문을 읽었다>(다우. 2005)를 읽어볼 일이다. 그 책은 야간통금과 만원버스, 긴급조치 시절, 장발족, 모던걸, 혼분식, 명랑운동회 등 1950년부터 2002년까지 반세기 동안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문화 에세이다.

에피소드 제목만 봐도 왠지 흥미롭다. `그 오묘한 성인용품`, `저것들이 캠퍼스에서 뒹굴다니`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제목이 많다. `조용필이 좋아, 이주일이 좋아`, `외화벌이를 위해 필리핀 여배우를 수입하다`, `김정일의 사생활과 북한의 비극`, `마라톤 우승해서 조국통일 앞당기자`, `36년 전의 하리수`와 같이 당시 세태가 제목엔 고스란히 묻어난다.

`뉴앙스` `휘나아레` `뉴우 훼이스` `랑디부` `맨너리즘` 등 옛날식 문어체를 발견하는 재미도 적지 않다.

기사를 보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묻어난다. 60년대 새해 벽두 신문 사회면엔 20대 초반 처녀가 남자친구로부터 강제 키스를 당하고 비관, 어머니가 묻혀 있는 망우리 공동묘지를 찾아 쥐약을 마시고 자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녀는 유서에 `입술을 잃은 것은 순결을 잃은 것과 같으므로 어머니에게 죄를 지은 나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다`라고 남겼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흑백TV시대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지금 관점으론 코웃음칠 일이지만, 어머니 아버지들을 생각하면 코끝이 시큰해지는 일이다.

기사와 함께 자료용 흑백사진도 풍성하다. 빵모자를 눌러쓴 버스 여차장이 등장하는가 하면 장발단속에 걸린 사람들 행렬이 나타난다. `재건대원`으로 불린 넝마주이들의 작업 풍경, 옛날 유행하던 낙엽 모양으로 멋을 부린 사진첩, 초코맛 과자 `아폴로`도 추억을 부른다.

옛날 분위기를 내기 위한 출판사의 연출솜씨도 엿보인다. 종이는 까끌까끌하며 현재와 과거기사를 도드라지게 대비시킨다. 저자의 해설은 변사가 읊조리는 느낌이다. 저자가 `장손이었던 백낙이네 큰형은 월남에서 무사히 돌아왔을까요. 궁금합니다`라는 식으로 끝마무리를 하면 가만히 책을 내려놓고 상념에 잠기고 싶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옛날 에피소드 모음집으로만 본다면 곤란하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제와 `과거는 현재의 얼굴`이라는 말을 되새긴다면, 이 책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책`이 아닌 `역사책`으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옛날 신문들은 잘 정리된 단행본보다 더 매혹적인 역사책이요 풍속사책"이라고 책머리에 밝힌 것처럼 말이다.

저자의 이런 의도를 반영하듯 이 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비교를 통해 현재 속에 남아있는 과거의 케케묵은 흔적을 끄집어낸다. 또한 언제 되살아날지 모르는 과거의 재현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가령 1986년 설립된 `평화의 댐 건설추진위원회`가 1998년 1월 `위원회를 존속시키도록 한다`는 결정을 마지막으로 한번도 열리지 않은 채 존속하고 있다는 기사는 `반공`의 망령에 여전히 사로잡힌 현실을 꼬집는다.

"주변을 살펴볼까요. 오늘 누가 또 금강산댐을 얘기하고 있는지, 오늘 누가 우리의 머리에 공포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를 심으려 애쓰고 있는지……. 다시 그 시절의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되겠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과거의 기억들이 때로 오늘을 되돌아보게 하는 반성의 근거로, 때로 내일을 준비하는 계획의 근거로 남아 있게 된다면 무척 기쁜 일일 것"이라고 희망한다.

저자 이승호는 스포츠조선에서 사회부, 문화부, 연예부 기자생활을 거쳤고, 현재는 홈쇼핑 채널 농수산TV에 근무하고 있다.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의 저자 조한욱과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추천의 말을 썼다. [북데일리 김대홍 기자] paranthin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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