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이순신` 전쟁영웅 김영옥의 삶
`21세기 이순신` 전쟁영웅 김영옥의 삶
  • 북데일리
  • 승인 2006.01.1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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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12월 29일 미 로스엔젤레스 시더스 사이나이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전설적인 한국인 전쟁영웅 김영옥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 김영옥 예비역 대령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내셔널 메모리얼 묘지에 안장됐다.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 프랑스 십자무공훈장에 이은 국가 최고 훈장인 `레종 드뇌르(Legion d`Honneur)` 무공훈장, 미국 특별무공훈장, 한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 등 20여개의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 김영옥.

미군 역사상 육군 전투대대를 지휘한 첫 소수민족 장교이자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로마 해방을 앞당긴 주역,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두 차례 받은 전설적 일본계 부대(442연대 100대대)를 이끈 장교, 한국전에서는 무패의 신화를 남긴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을 지냈다.

2차대전 후 전역했다가 한국전 발발 후 입대를 자원한 김 대령은 패전을 거듭하던 1대대의 대대장이 되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갔다. 동부전선에서 38선을 60km나 끌어올려 현재의 휴전선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963년부터 2년 동안 한국에서 미 군사고문단에 근무하면서 국군 최초의 미사일 부대 창설 등 한국군의 현대화를 도왔다.

사지를 넘나드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 총알과 수류탄 파편은 그의 몸 11곳에 신경을 잘라놓았고 2차 세계대전 참전 때 잃은 손가락 일부와 한국전쟁 당시 부상으로 받은 40차례의 수술은 영광의 상처였다.

지난 2000년 미 육군으로부터 ‘노근리 사건’에 대한 외부전문가위원회(outside experts committee) 위원으로 위촉됐고 2003년 한국 정부로부터 사회봉사 활동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78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최대의 자선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의 LA 지부(chapter) 이사를 지내며 재미일본인을 포함한 미국내 소수민족의 권익에 앞장섰던 고 김영옥 대령은 미 최대 한인봉사단체로 성장한 한인정신건강정보센터를 만들었고 한인 2세를 위한 한인청소년회관, 한미연합회, LA 한인건강정보센터의 설립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자 전쟁영웅으로서 사회봉사에 앞장섰던 그였지만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예의는 그가 진정한 영웅임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준다.

퓰리처상 후보에도 올랐던 재미 저널리스트 한우성(49. `뉴 어메리카 미디어` 한국부장)씨가 97년부터 500회 이상 김영옥 대령을 인터뷰해 써낸 논픽션 <영웅 김영옥>(북스토리. 2005)는 2차대전 당시 영웅 이전의 `인간 김영옥`을 이렇게 묘사한다.

"순간 잠깐 생각에 잠긴 아카호시 일병이 기관단총을 다시 등에 메더니 가슴에 차고 있던 수류탄 두발을 떼어낸 양손에 들고는 영옥을 쳐다봤다. 영옥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카호시 일병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빼지 않은 채 참호 바닥에 내려 놓고 밖으로 나왔다. 다른 독일군이 참호에 왔을때 미제 수류탄을 보고 초병들이 포로로 잡혀갔음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불가항력인 상황에서 포로가 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적이라도 탈영병으로 취급받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다. 영옥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한 것은 서로 말은 안했지만 영옥도 아카호시 일병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1943년 9월 로마의 외항(外港)인 안지오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북쪽에서 보강 병력이 대거 내려와 안지오를 포위한 독일군과 장기 대치상태에 빠졌던 상황. 스스로 작전을 자원한 김 대령(당시 중위)과 일본인 전우가 생포해 온 독일군 2명의 자백으로 연합군이 승기를 잡게 된 것이었다.

1944년 5월 23일 버팔로 작전으로 연합군은 로마를 지키는 독일군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하고 6월 4일 드디어 로마에 입성했다. 로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바로 이틀전이었다.

김 대령은 당시 작전참모로서 연합군의 피사로 무혈입성 전략을 펼쳤는가 하면 탱크가 내려갈 수 없는 산비탈에 탱크를 내리는 전략으로 독일군 탱크부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 기존 유럽식 전쟁방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전략으로 연이은 승전을 거듭함으로써 오늘날 미국 군사교본을 다시 쓰게 만든 장본인이 된다.

2001년 재미 일본계 교육재단인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는 김 대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60분짜리 단편영화로도 제작했으며 2003년 KBS다큐 `한민족리포트`이어 2005년 `MBC 스페셜` 역시 김 대령의 일대기를 다뤘다.

(사진 = 1. 한국계 미국인 전쟁영웅 김영옥 전 미군대령이 지난해 2월 5일 LA주재 프랑스 총영사로부터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인 ‘레종도뇌르’ 를 받은 뒤 수훈 소감을 밝히고 있다. 출처 국정브리핑 자료 2. 고 김영옥 예비역 대령이 한국전쟁 참전(1951~1952년)당시 돌보던 고아원 아이들)

[북데일리 원희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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