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행방을 찾아 다시 돌아온 `전경린`
사랑의 행방을 찾아 다시 돌아온 `전경린`
  • 북데일리
  • 승인 2006.01.0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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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한남자로서의 의무를 끝냈어. 민방위 소집 기간도 끝났고 작은 아이도 스무살이 되었어. 그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묵묵히 마을버스와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환승하며 돈을 벌러 다녔고, 부모를 모셨고, 직장의 의자를 지켰고, 아내가 살림에 전념하도록 안심시켰고, 집에도 꼬박꼬박 들어갔어. 가족을 사랑해. 하지만, 내가 가족을 사랑하고 내 아이들이 나를 사랑한다 해도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함께 살지는 않아. 아이들은 성장해 짝을 만나지. 나도 그렇게 집에서 떠나고 싶어.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성장해 집이 비좁아지면 분가하듯이, 그렇게 내 삶을 분가하고 싶어. 벽에 꽝꽝 박혀서 뭐든 주렁주렁 걸고 버텨야 하는 못 같은 인생에서 벗어나 나를 위해 살고 싶어.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혜규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이 시간을 삶으로 살아 보고 싶어.”(책 본문 중)

황진이 이후 1년 4개월 만에 돌아온 전경린(43)의 장편소설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이룸. 2005)의 유부남 형주가 연인 혜규에게 하는 대사다. 한순간도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았던 관계에서 형주가 뱉는 말에 혜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주인공 혜규는 첫사랑 인채와의 결혼을 앞두고 파혼한 쓰라린 경험이 있는 여자다. 두 사람의 성격차이나 집안 반대 때문이 아닌 어떤 한사람의 고의적인 ‘침입’으로 단 2주를 앞두고 파혼한다. 자살을 기도 할만 했던 이 충격으로 혜규는 고향을 떠난다.

전작에서 이어져온 전경린의 열기는 여전하다. 흩어진 형제와 자매들을 모으고 녹아가는 어머니의 정신과 육체를 담는 모습은 누구보다 간절히 살고자 원했던 이들의 바람을 담는다.

`삶을 그리 쉽게 소유하는 것이 불안하고 달콤했던` 혜규는 사랑하는 인채가 남편이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기를 반복했다. 고요한 삶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행을 예고하는 전경린에게 삶이란 늘 그렇게 깨어짐과 다시 일어섬을 반복하는 끈질긴 ‘투항’이다.

눈에 띄는 것은 부모세대의 결혼과 삶을 바라보는 자식의 시선이다. 주로 30대 여성의 결혼과 불안, 연애와 혼란을 담아온 작가는 마흔을 넘긴 지금 어머니의 삶을 바라본다.

“죄책감이 아니라. 니 아버지 없으니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니 아버지 없으면 편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달리 목숨 부지하는 데에 아무 이유도 없는 허접한 과부야. 집을 버리고 훌훌 나가니 아버지 옆에 눕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든다. 니 아버지 살았을 때는, 내 뜻대로 한 게 아무것도 없었어도 인생이 위엄이 있었다. 힘겨워서 쓰러질 것 같았어도 이렇게 허접하지는 않았어. 차라리 니 아버지 밑에서 완전히 뼈가루가 되는 게 나을 뻔 했다”(본문 중)

딸은 평생 아버지의 가부장적 통치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어머니의 회한에 공감할 수 없다. 독단적인 권력이 사라져 버린 공간에서 공황상태에 빠진 환자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전경린은 그런 딸의 편을 쉽게 들어주지 않는다.

혜규와 인채의 결혼을 방해한 예경을 악인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런 사람을 잉태하고 기른 무관심과 냉대를 지적한 것처럼, 어머니를 이렇게 만든 건 수년간 집을 등지고 돌아보지 않았던 딸 혜규의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폭력이 어머니의 젊은 날을 골병들게 했다면 자식들의 냉대와 무관심은 심장을 골병들게 했다.

어머니의 살과 뼈마디를 만지자 7년 동안 뾰족하게 날이 섰던 시간의 모서리들이 일순간 마모되며 딸의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그래도 어머니는 사람과 세상에 상처입고 헤지느라 바빴던 딸의 시간을 탓하지 않는다.

“꼭 한번 네게 이 말을 털어 놓고 싶었다. 네가 집을 떠나 가족과 소식을 끊은 뒤로 내 가슴이 늘 답답했다. 찾아가 볼 작정을 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되었다. 원망은 잊어주렴..”

여전히 전경린의 삶은 불안하고 우울하지만, 같은 자리를 맴돌지 않는다. 상처를 준 사람과 입은 사람은 나란히 고통스럽고, 나란히 새살을 얻는다. 돌아온 자녀를 보듬어주는 어머니의 심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딸은 그 안에서 울고 싶다.

전경린의 신작은 그렇게 상처 입은 누군가의 등 뒤에서 ‘함께’ 울어준다.

(사진 = ‘Adam Salwanowicz’ 작품) [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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