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레 민박집`에 둘러앉아 새해를 맞다
`아흐레 민박집`에 둘러앉아 새해를 맞다
  • 북데일리
  • 승인 2005.12.3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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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떼는 무사히 도착했는지/아직 가고 있는지/아무도 없는 깊은 밤하늘에/형제들은 아직도 걷고 있는지/가고 있는지......”

김규동 시인의 ‘송년’이란 시다. 기러기도 기러기지만 닭들의 안부를 묻고 싶은 시절이다. 오대산 월정사 가는 길, 외박골 <아흐레 민박집>(창비.1999)에서 박흥식 시인이 닭의 뒤를 ?고 있다.

“한겻을 건달처럼 노닐다가//손님이 오셨다//월정사 들리는 외박골 토종닭집/탐스럽게 수국 핀 뒤꼍이라 요두전목//까불까불 눈 굴리고 벼슬 흔들어//에이고! 깃은 날리고//하루 건너 이 벼슬 저 벼슬//오만가지 꽃잎 다 진다는 소리.”(‘닭벼슬’)

붉으락푸르락 닭벼슬이 뒤꼍에 꽃처럼 쌓여있다. 얼마나 많은 달구새끼 목을 내동댕이 쳐야 기나긴 겨울을 날 것인가.

“말이데,/이 집의 겨울은 무정란의 불구/냄비 하나와 딱딱한 구들뿐인데/두붓살에 미꾸리 파고드는 밤/쩔쩔 끓는 아랫목에 불줄기 줄줄 녹는 밤/서툴게 끄냈다가 무장무장 끌고 가는/음탕방탕 화두도/읍내로 소주 받으러 간/거, 혁명적 낭만주의자라는 시형들도/꽁꽁 얼어붙은 자지가 다 깨지면서/동지섣달 엄동도 난세 중 지낼 만한 난셀 건데/아랫배에 잔뜩 베개를 끌어안고/무시시하게 말인데,/이 집의 겨울은 바람벽이 문/울고불고/냄비 하나와 딱딱한 구들이 하나/날이 선 작두가 하나, 딱 하나.”(‘닭을 잡는 겨울집’)

병아리 하나 만들지 못하는 주제에 허구한 날 음탕한 작둣날만 세워쌓는다. 대저 이 하릴없는 사내들에게는 낫이 약이리라. 낫으로 부랄을 딴다고 설쳐야 꼼지락거릴 것인가.

“쪼그라든 쇠전 옆/나자빠진 대장간 풀무질/꼴도 베고/갈라진 논바닥도 베고/장터 한바퀴 휘이 돌아/평생을 양지쪽만 쫓아다닌/독한 놈 모가지도 썰컹 베고/바짓가랑이 잔뜩 소주를 물고/내 목을 쳐!/제 발로 지서에 찾아들었다가/나이 어린 이장의 너름새나/팔구슬림은 못 이기겠다는 식으로/비닐끈에 친친 감기는/간단히 경운기에 실리는/내 고향의 저녁 해/둥글게 궁글러 다니는/미친 척 저녁 해.”(`낫`)

메뚜기 같은 팔뚝을 허공에 내지르며 닦달을 하던 아버지가 그립다. 독 오른 낫 같던 아버지의 날을 새끼로 동여매던 옛일을 생각하니 스르르 눈이 감긴다.

“눈을 감으면 보인다/언제나 허술하고 어줍으므로/그대들 사는 커다란 의미와는 달리/과도한 적막으로 산다는 거기와는 분명히 달리/여기엔 아직도 사람이 보인다/어제도 오늘도 돌부리 가득한 고샅길에도/너무도 잦고 지겨운 돌아오는 저 사람들이.”(‘사람이 보인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쉽사리 떠날 수 없는 민박집에 이 집 따님이 돌아왔다. 연곡천 하류의 은어처럼, 상류의 산천어처럼 부추꽃 같이 하얀 그분이 오셨으니.

“이슬 내린 뜰팡서/촉촉이 젖어서 자던 신발들이 좋다/모래와 발바닥과 강물이 간지럽다/숙취 하나 없다/아침부터 마셔도 취하지 않는 이 바람/바람의 살/그 살결의 허릿매가 저리게 좋다/돌아갈 곳을 가로막는/파꽃 같은 이 집 돌아온 따님이/들어가 나오지 못하는 부끄러운 부엌/그 앞을 종일 햇살로 어정대서 좋다/병 주둥이 붕붕 울리며 철겹게 논다/그렇게 노는 게 좋다 한다/안 떠나는 게 좋아서 아흐레 민박집/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던/바람의 속살이 잠을 설쳐서/마냥 이 집이 마음에 좋다.”(‘아흐레 민박집’)

달구새끼 씨 말리도록 민박집을 안 떠난 이유가 있었구나. 아흐레만 아흐레만 하더니, 입이 허벌레 해졌구나. 까마귀가 형님하고 부르도록 안 씻던 때 밀러 읍내에도 나가고 말여.

“몰아치는 흙바람 속을 오가지 못해서/옷깃에 얼굴을 묻고 등 돌린 여인이 서 있던 자리/시끄럽게 소나기 지나간 뒤/생경한 푸른 나무 한그루가 프르르, 빗물을 털며 비눗내 은은히 번져내는/이 오전 10시경이 좋다/그 곁으로 작은 여아의 키만한 어린 나무까지 있어/폐활량 깊은 눈도 상쾌해서 저마다 좋다/이쯤이면 목욕탕 앞길은 도덕보다 큰 것이 물씬하다.”(‘목욕탕 앞길’)

목욕탕 앞길을 따라가면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수탉이 낮달처럼 조는 고샅에서 낯익은 강아지가 쫄래쫄래 반기는 고향이다. 새로 태어난 강아지를 나이든 달구가 정겹게 쪼아대는 고향이다. 아흐레 민박집 위로 기러기 한 떼 신년연하장처럼 날아간다. 구구......

(사진 = 출처 www.elifeplus.co.kr)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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