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를 위한 `시인의 노래`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를 위한 `시인의 노래`
  • 북데일리
  • 승인 2005.12.2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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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 선 뭇 봉우리, 가운데는 들판. 수레와 말방울 떨렁떨렁 큰 들판에 널렸구나. 성 위엔 아직도 당나라 때 달이 남아 있어, 반쪽은 이지러졌고 남은 빛은 그대로 비치는구나.”

추사가 연경으로 가던 중 안시성에 이르러, 고구려 양만춘이 당태종을 물리쳤던 일을 상기하며 읊은 시다. 그로부터 44년 전, 1765년 11월 같은 길을 걷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북학의 선구자 담헌 홍대용이다. 유종인 시인의 <교우록>(문학과지성사. 2005)을 읽으며 그의 행적을 더듬어보자.

한양에서 연경까지 삼천릿길.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 심양, 산해관을 지나 연경까지 대략 달포를 걸어야 한다. 10월말에 출발하여 동짓날에 맞춰 연경에 도착하는 것이 관례다. 해질녘 주린 배를 부여안고 길을 재촉하는데 어디선가 팥 쑤는 냄새가 솔솔 난다.

“하얀 알심을 깜냥껏 쓸어 넣고 그 해의 향내 나는/나뭇주걱으로 아비의 마음을 휘휘 저어주고 싶다”(‘겨울 저녁-어머니와 팥죽’)

애틋한 마음 한 그릇 제대로 떠 넣어 주지 못한 두 딸 생각에 눈시울이 보랏빛이다. 오동나무는 자꾸 잎을 키워 줄기를 가리려 한다.

“내게도 오동나무를 심어 시집보낼 딸이 둘이나 있다/오동나무 궤짝으로 멀어질 딸이 울고 웃고 있다”(‘오동나무 한 채’)

날이 저물어 객잔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려는데, 주인은 없고 버드나무에 흰말만 괜시리 매어있다. 벌써 한바탕 싸움이 지나갔나 보다.

“주인이 오지 않는 흰말과 버드나무/사이에 能手와 能爛의 連理枝 고삐 끈이 늘어진다/버드나무는 오히려 짐승처럼 징그럽고/흰말은 꽃핀 오두막처럼 고요하다”(‘柳下白馬圖를 보다’)

버드나무와 말의 희롱에 밤새 뒤척이다 북경유람에 나선 담헌은 평생의 벗인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조우하게 된다. 담헌은 이 만남을 “한 두번 만나자 옛친구를 만난 듯 마음이 기울고, 창자를 쏟아 형님 동생 하였다”고 ‘회우록’에 썼다. 그러나 한달 후 한양에 돌아온 담헌에게 엄성의 죽음이 전해진다. 담헌의 처소에 눈이 내리고 있었을 게다.

“내리지 않는 눈이/가장 순수한, 착한 눈이었다/친구는/죽은 친구가,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가/제일 좋은 친구다”(‘交友錄’)

“떠돌다 한 자리에 묻히는 사람들 앞에/한 자리에만 죽도록 머물다 샛강으로 흘러가는 그가/마지막까지 희고 희었다”(‘눈사람傳’)

그 후 담헌은 석치 정철조와 밤새 등잔불 아래서 천문과 실학을 논하는 일이 많았다. 벼루를 깎아 상심의 먹물을 담아두려 했나보다.

“오랜만에 본 친구가 옛일을 부풀릴 때,/내 얼굴에도 쓸쓸한 웃음이 파였다/모두에게 가려고 나는 나를 깎아왔는데”(‘벼루를 깎다-石癡 鄭喆祚를 그리며’)

겨울은 가고 추녀에 봄빛이 괸다. 담헌은 묵혀두었던 벼루를 꺼내 새 매화와 까치를 불러들인다.

“처음 보는 산까치다/처음 보는 매화꽃이다/산까치가 매화나무에 발을 묶자/매화꽃은 새의 몸으로 흔들렸다”(‘흐린 날의 花鳥圖’)

처음 만나 서로를 묶어주고 흔들려주던 시절이 허공에 붉은 영산홍으로 피었다가 옅어진다. 그 꽃 지운 자리에 노옹이 홀로 앉아 조주록을 물어 뜯고 있다.

“버려진 집 툇마루에/한 마리 늙은 개, 趙州錄을 읽고 있다”(‘오후의 別辭’)

해가 저문다. 말년에 중풍을 얻은 담헌은 낙향하여 그야말로 만병을 회진하다 간다. 볕 찬찬히 드는 툇마루 아래 토방에 웅크린 늙은 개 한 마리 교우록 한 권을 다 핥고 있다. 저 책 한권 다 녹으면 착한 눈 한 짐 푸짐하게 내리려나.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눈으로...

(그림 = 1. 이영윤 작 `화조도` 2. 류하백마도)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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