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타오른 꽃파도 타고 삶이 춤추다
붉게 타오른 꽃파도 타고 삶이 춤추다
  • 북데일리
  • 승인 2005.12.2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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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이 이울기 시작하자, 사람이 되고 싶은 새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찢는다. 음력 스무날이 되면, 새는 사람으로 변장하여 지상에 내려온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새인 것이 하현달처럼 인간들의 어깨위를 선회한다. <춤>(창비.2005)의 대가 박형준 시인이다.

춤의 3요소는 빛과 꽃과 새이리라.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빛은 어둠의 빛이다. 달빛을 받으면 꿈틀대는 달맞이꽃처럼, 시인은 저녁꽃밭의 살내음을 본능적으로 맡는다.

“밥 짓는 연기여/살 타는 냄새가 난다//지붕에 뿌리 내린/풀꽃을 위해/풀꽃이 바라보는 풍경들 위에/막 눈을 뜬 세계를 풀어놓았으니,//아궁이에서/일렁이는 불길이/얼굴을 적셨으니/타고 남은 재를/흙바구니에 담아/공중에 흩뿌려놓았으니/수만개의 별빛이/하늘과 호흡하는/너의 폐부 속으로 스며들었으니//숨을 내뱉어라/올라가서 올라가서 이제,/바람에 뒤척이는 꽃밭이 되어라”(‘저녁 꽃밭’)

춤의 4요소는 여기에다 밥이 추가된다. 체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몸이 나비처럼 가벼워지는 것이다. 작업에 나가기 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허기를 달랜다.

“한밤에 쌀 씻으러/포대를 열자/나방이 날아오른다/밤에만 무늬를 제 비늘 속에/새겨 넣으며/날아오를 날만 기다렸겠지/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는/반지하의 한켠에 쑤셔박힌 쌀포대/눅눅한 어둠속에서/일시에 날아오른 나방떼/배고픈 밤의 덧없는 출구 속으로/팔을 늘어뜨리고/기나긴 밤을 퍼낸다”(‘나방’)

준비가 끝나자, 시인은 무대 2층 3시 방향에 자리를 잡는다. 먹잇감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허나 쉽사리 나서지 않는다. 빛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포인트다.

“누가/발자국 속에서/울고 있는가/물 위에/가볍게 뜬/소금쟁이가/만드는/파문 같은//누가/하늘과 거의 뒤섞인/강물을 바라보고 있는가/편안하게 등을 굽힌 채/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모습을 보고 있는가,/누가/고통의 미묘한/발자국 속에서/울다 가는가”(‘빛의 소묘’)

삶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흔적 없이 우는 이의 눈물을 조명하듯, 시인의 눈빛이 무대의 뒤편을 훑고 지나간다. 거기 한 여자가 파도위에 잠들어 있다.

“여자는 내 숨냄새가 좋다고 하였다/쇄골에 입술을 대고/잠이 든 여자는/죽지를 등에 오므린 새 같았다.//끼루룩 우는 소리가 들렸다/밤새 파도 속에서/물새알들이 떠밀려 왔다”(‘파도리에서’)

죽음과 탄생에 배어있는 이 치명적인 유혹. 종족 재생산의 부리 앞에 놓여있는 먹잇감의 가여운 눈망울. 야성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새는 부리를 크게 벌리며 알을 상상한다.

“그녀와 키스할 때면/이마에서,/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난다/뼈와 근육 너머로/내 영혼을 들여다보는/건기의 불꽃,/약한 기세가 있나/소혓바닥처럼/쓰윽 핥고 지나가는//야생에 눈을 뜨면 시작되는 여행”(‘달’)

이윽고 저지할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비행이 시작된다. 절벽 소나무 사이에 도사리고 있던 송골매가 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자, 새의 포효가 달을 절반으로 쪼개어 놓는다.

“근육은 날자마자/고독으로 오므라든다//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전율 사이/꽃이 거기 있어서//絶海孤島,/내리꽂혔다/솟구친다/근육이 오므라졌다/펴지는 이 쾌감//살을 상상하는 동안/발톱이 점점 무늬로 뒤덮인다/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동이일까/천길 절벽 아래/꽃파도가 인다”(‘춤’)

꽃은 공포에 떨고, 바다는 핏빛이니, 새는 고독하다. 연습일지라도 춤은 긴장과 팽창, 전율과 쾌감 사이를 비행하며 생의 절벽을 오르내린다. 꽃파도가 붉게 타오른다. 꺅!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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